당신은 종속되어 있다
유명 게임 개발자 시드 마이어의 최신 게임인 문명 6(Civilization VI)의 주제가인 Sogno di Volare (Christopher Tin 작곡)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L’uomo verrà portato dalla sua creazione, come gli uccelli, verso il cielo
이탈리아어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통해 새처럼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멋있는 인간 찬가이다. 그렇다. 인간은 스스로는 날아오를 수 없는 가장 나약한 동물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나, 그 모든 한계를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극복하며 자신을 낳아준 지구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기술이란, 인간적인 것이며 이성과 더불어 문명을 떠받쳐온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세계를 지었으나 인간은 지어진 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조차 만들어내며 시간의 구속조차 뛰어넘고 세대를 거듭해 역사와 문명, 이성과 기술의 주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대개 우리는 기술적인 진보가 우리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무선 디스플레이, 무선 오디오, 무선 인터넷, 무선충전, NFC, RFID, Bluetooth, 5G, 클라우드 저장소 등 새로운 무선(wireless) 기술들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의 몸과 우리가 영유하는 삶은 더 이상 물질적인 실체에 속박되기를 거부한다. 누가 집 전화기가 사라질 것을 상상했으리오, 누가 감히 무선으로 인터넷 없이 기기간 파일을 교환할 수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유선 충전기에 연결하지 않고도 무선 충전 패드 위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잊힌 기술적 진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이전과 정말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기술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학적으로 정의해보면, 선이란 점이 움직인 자취이며 2차원에 존재한다. 쉽게 말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양 극단 두 개의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 선이다. 예컨대 벽의 콘센트와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충전 ‘케이블’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Qi 표준의 무선충전 기술은 핸드폰에 이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고도 핸드폰을 무선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실상 이 무선충전기를 사용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무선충전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기술이다. 결국에는 핸드폰을 완전히 충전기에서 떨어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충전 패드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는 것으로 핸드폰은 충전되겠지만 여기에서 단 1cm 조차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무선충전기’로서는 크나큰 약점일 것이다. 기존에는 충전기를 연결해둔 채로 케이블을 길게 늘어뜨려 벽에서 멀리 떨어져 핸드폰을 충전하며 가지고 놀 수 있었지만 이 충전 패드는 결코 벽 주변에서 떨어질 수 없다. 오히려 충전 케이블보다 몸집도 크고 약간만 미끄러져도 충전이 되지 않으니 충전하면서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이용자들은 가뜩이나 충전 속도도 유선 충전기에 비해 느린 무선충전기를 좋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반대로 벽에 달라붙어 핸드폰을 하거나 핸드폰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고 포기해야 이 무선충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무선충전기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종속을 야기한 것이다.
언제나 기술의 발전은 특정 직업군의 실업 혹은 재취업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버스 교통의 대국으로 명성이 자자한 터키에서는 관영 버스와 사설 버스가 공동으로 노선을 운행하는 일이 잦은 편이다. 문제는 시마다 제각각의 표준을 도입해 서로 다른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사설 버스나 미니버스에서는 이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지역이 태반이다. 한편 2019년 중후반에 이르러 터키 앙카라 시는 사설 버스에도 교통카드 대응 장비를 설치했다고 발표해 이용객들이 더욱 편리하게 버스 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터키의 사설 버스들은 대부분 운전사와 더불어 현금으로 요금을 받고 표를 나눠주는 직원이 따로 있는데, 앙카라만큼은 이제 현금을 개수하던 직원들을 보기 어려워질 모양이다. 사설 버스는 현금으로 승차하고 관영은 현금 승차가 불가능했기에 앙카라의 버스 이용객들은 동전 몇 개가 모자라다고 수십 분을 기다려 교통카드로 결제하고 관영 버스를 타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몇 년째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편리했을지언정 사설 버스에서 돈을 걷던 직원은 어느 순간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 직원들이 앉던 자리는 칸막이를 철거하고 승객의 자리가 되었다.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귀찮던 우리들은 어느새 현금을 없애버리고 지갑을 카드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카드는 언제나 그랬듯 우리에게 공포스러운 고지서를 가져다준다. 수중에 돈이 얼마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욕망에 이끌려 물건을 사고 돈을 낭비하고는 한다. 카드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과소비 가능성도 더한다. 이제 해외여행을 할 때 종종 여행객들은 현금 대신 해외 현금인출 혹은 해외 결제가 가능한 카드를 들고나가기도 한다. 일부 카드의 낮은 해외이용 수수료는 이제 은행에서 환전 수수료에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저렴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핸드폰 회사들은 앞다투어 자사의 핸드폰에 무선결제 기능을 탑재하고 삼성이나 애플 같은 대형 회사들은 금융권들과 힘을 합쳐 소매점들에 진출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지갑마저 들고 다니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을 초래할지는 자명하다. 이른바 원클릭 결제로 사전에 등록된 카드 정보를 이용해 무엇이든지 구매가 가능한 미국의 Amazon에서는 물건을 구입하려 할 때 이용자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불필요한 결제창에 인증번호를 쓰고 보안코드를 입력해야 하는 그런 짜증 나는 상황을 회피하고 단숨에 결제를 완료할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아마존의 판매전략과 맞물려 과소비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결제 분야에서의 기술적 진보는 결제를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을지언정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단순히 더 쉽게, 더 많이, 어떠한 위기감도 느끼지 않은 채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면대면으로 만날 필요도 없이, 한 사람을 마주하기 위해 걱정하고 준비하고 조심스러워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 사람의 소셜 계정들을 추적할 수 있고 주변의 지인들을 통해 그의 사적인 삶을 완전히 해부할 수 있다.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진과 동영상들을 보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마치 취한 것처럼 인터넷에 기반한 인간관계에 중독되어있다. 더 이상 오랜 옛 친구의 안부를 묻기 위해 불필요하게 전화하거나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된다. 그의 생일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을 적어둘 필요도 없다. 이 무선의 시대에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조차 분리되고 있다. 사람과 사랑을 왜곡된 형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우리들은 과연 정상일까? 우리는 과연 정말 유선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었을까?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우리는 더 이상 랜선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더 잦게, 사실상 깨어있는 시간 내내 인터넷에 종속되게 하는 또 다른 효과를 낳았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기 위해 네이트온, MSN과 같은 메신저를 켜놓고 다른 일을 하던 우리들은 이제 책을 읽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누군가의 연락에 답장을 하고 있다. 그 뜨거운 설렘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어디로 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기술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는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Amazon이 출시하고 전 세계적인 파란을 일으켰던 전자책 시장은 휴대폰과 태블릿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위축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시장을 지키고 있다. 대표적인 전자책 뷰어인 Kindle은 wifi와 Bluetooth를 탑재했지만 책을 읽고 오디오북을 청취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내에서 출시된 내로라하는 대형서점들의 전자책 뷰어들도 대부분 이와 같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바꾸는 주권은 기술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몫이다. 알록달록한 LCD와 OLED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최첨단 기기들이 아무리 좋아져 봐야 결국은 종이를 뛰어넘을 수 없었고 휴대성을 강화한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만들지는 못했다면, Kindle을 위시한 전자책 뷰어들은 우리를 과감히 인터넷에서 분리시키고 책에 집중하게끔 유도하며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를 탑재해 종이에 인쇄된 책과 동일한 경험을 제공한다. 누구든지 iPad를 살 수도 있고 Kindle을 살 수도 있고 혹은 둘 다 살 수도 있지만 이 기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들에게 달린 문제이다. 누군가는 초고가의 iPad Pro를 이용해 Netflix를 보고 YouTube를 감상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문서작업을 하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Kindle은 그러한 고민 자체를 차단한다. Kindle이 손에 들려있다면 wifi가 없어서 책을 다운로드할 수 없다든지 wifi가 약해서 공유기 근처에 달라붙어있어야 한다든지, 미처 미리 책을 다운로드하지 못해 통신사 망을 이용해 책을 받아야 할지, 이러한 고민들 자체가 애초에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휴대폰의 알림 창을 빼곡히 채우는 메시지들을 뒤로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가 아닌 가방에 집어넣고 책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불편하고 초조하지만 곧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인터넷이 없는 채로 10분을 버티기가 힘들던 나는 인터넷 없이도, 연락을 재촉하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인터넷 친구 없이도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정한 무선(wireless), 유선 세계로부터의 자유란,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기술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슬기롭게 이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