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이사 안가면 안돼요?"
이제 막 세돌이 지난 큰딸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네가 여태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떠나기 싫을 수 있지…. 단짝 친구와 헤어져야하고, 시터 선생님과도 더 이상 만날 수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너에겐 첫 이별이겠구나. 마음 한 쪽이 찡해져 아이를 꼭 안아주며 물었다. "왜 이사 가기 싫어?"
"그 집이 너무너무 작아서요. 작은 집으로 가기 싫어요. 엄마 나 정말 이사 가 가기 싫어요."
와장창.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아이들에게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에 허리띠를 졸라매 더 크고 방도 많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계획했는데 그 집이 좁아 이사를 가기 싫다니! 궁궐로라도 이사를 가야하는 것이냐!
알고보니 며칠 전 이사 갈 집을 미리 둘러보러 다녀온 게 화근이었다. 가구 배치 등을 위해 집 사이즈 실측 차 지금 살고 계신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기들과 함께 집에 방문했다. 거실과 방을 살펴보다 나 역시 살짝 놀라기는 했다. 짐이 무척 많은 가족이었다.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화분들이 열을 맞춰 놓여져 있었고 크리스마스 장식용 트리도 두 개나 장식돼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해 성탄절이 지났지만 아직 트리를 치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쪽에는 아이들의 책이 가득했다. 내가 줄자를 가지고 집 곳곳의 길이를 재는 동안 딸은 거실에 펼쳐져 있는 놀이매트에서 블록놀이를 하고 있었다. 블록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양이 많아 딸아이 눈이 반짝거렸다. 별도로 있는 놀이방도 장난감 천국이었다. 기차놀이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잇감이 가득했다. 내심 내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집이 작다는 핑계로 내가 너무 장난감을 사주지 않은 걸까? 나도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니 장난감방을 채워줄 장난감 쇼핑을 좀 해볼까….
그런데 정작 실컷 놀다온 딸은 "이 집이 싫다"고 선언했다. '아, 그럼 장난감을 더 사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가 아니고 이 녀석아, 네가 싫어도 너는 이사를 가게 되어 있어. 이사를 가기 싫다는 딸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나와 남편은 '괜히 먼저 이사 갈 집을 보여줬나' 하는 후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어진 딸의 말에 안도(?) 했다. "여기(지금 살고 있는 집)가 훨씬 크다. 나는 큰 집이 좋아요. 여기가 더 크잖아. 왜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요?"
아! 어리고 순수한 딸의 눈에는 짐이 가득한 그 집보다는 물건이 적은 지금 우리집이 더 커보이는구나. 아직 아기라 장난감이 많은 것만 마냥 부러워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쾌적한 공간의 중요성을 더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해 놀랐다.
그러고 보니, 미니멀라이프 연구회의 책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미니멀라이프를 실천 중인 가정주부 아즈키 씨의 아들에게 그의 친구가 "너희 집은 호화로워서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즈키 씨는 그 말을 듣고 의아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한 친구의 집이 물건도 많고 장난감도 한가득인데, 정작 자신의 집을 보고 '호화롭다'고 표현하다니 말이다. 그는 아마도 아들의 친구가 잘 정리된 집을 보고 편안함을 느낀 게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미니멀 육아의 행복'이라는 책에서도 "아늑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에 있을 때 느끼는 그 쾌적함을 아는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놀이방이나 책상 위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몇 가지 장난감들만 눈에 보이는 곳에 예쁘게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샘솟는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나는 버리지 않기로 했다'의 저자 조석경 씨는 책에서 보통 사람들은 집이 넓어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었을때 으레 칭찬으로 "집이 넓어보여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며, 이 말이 집 안에 많을 것을 두지 않았다는 뜻, 즉 꼭 필요한 물건을 두었다는 뜻이 아닐까 라는 해석을 내 놨다.
만년 미니멀라이프 도전자인 나에게, 아직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내 딸의 "이사 가기 싫다"는 말은 그야말로 초특급 칭찬인 셈이다. 넓은 집보다는 넓어 보이는 집에 살기 위한 나의 도전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딸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