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천 Sep 27. 2021

옳은 말과 다정한 말 — 공감에 대한 단상

나이가 들수록 실감하는 변화 중 하나는 옳은 말이 듣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옳은 말,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생각과 다르지만 일리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무시해버리기에는 꺼림직한 말을 듣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격이 성숙해지고 성품이 원만해져야 할텐데,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나이가 들어 보니 그렇지가 않다.   


주위를 살펴 보니 나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 중 상당수가 비슷한 변화를 보이는 듯하다. 자기 말과 생각을 고집하고 남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물론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생각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나 자신의 고집스런 면을 발견할 때면 그런 변명을 하기도 한다. 이제까지 그리 못나지 않게 살아 왔으니 적어도 내가 겪어 보고 아는 것에 대해서는 내 생각과 판단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변명이다.     


문제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다 보면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인 말다툼에 이르는 일은 거의 없다. 거기에 이르기 전에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차츰 거리를 두게 된다.      


나이가 들며 생기는 고집은 에너지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 소화하려면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 에너지 뿐만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도 점점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러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력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결과 유연성이 줄어들고 생각이 경직되어간다. 

     

이런 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이런 생각을 한 이상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은 있다. (신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해야 하듯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매일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옳은 말 대신 다정한 말 하기다.      


남이 내게 옳은 말을 하면 듣기 싫은데, 내가 하는 ‘옳은 말’을 남이 듣기 좋아할 리가 없다.  설사 그 대상이 아내나 자식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식들도 이제 다 성인이니 자기 생각과 판단이 있다. 그런 자식들에게 이게 옳다고 얘기하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돌아서면 흘려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 가급적 해야 할 말은, 어떠냐고 묻는 것이다. 관심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이다. 공감이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내 생각은 이렇다고 얘기해주는 것 정도다. 나머지는 듣는 사람의 몫이다. 만일 다정한 말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     


옳은 말보다는 다정한 말이 살아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실감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세신사에게 준 선친의 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