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 Jieun Lewina Jan 05. 2021

한 음절의 위로, 술

꼬시고 싶은 그 남자


실버오크 2015
미국 /소노마카운티 /알렉산더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95.3% + 메를로 + 말벡 + 프티 베르도 + 카베르네 프랑

풍부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최첨단의 설비가 결합되면 실패 확율이 현저히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실버오크는 한마디로 그러한 지극히 미국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자본주의적(?)인 와인이다. 시작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나 할까. 석유 재벌과 금손 와인메이커가 손을 잡고 미국에서 가장 테루아가 좋은 곳에서 재배한 포도의 제왕 카베르네 소비뇽을 고집해 미국산 오크만으로 숙성시킨 와인을 만든다. 주인공은 카베르네 소비뇽이지만 작황에 따라 메를로와 말벡,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 등을 아주 소량 블렌딩한다. 기가 막히다. 보르도 와인을 지향하는 메리티지 와인과 달리 실버오크는 제법 '독자적' 이다. 그래서 실버오크를 향해 컬트 와인이라고는 불러도 메리티지 와인이라고는 부르지 않나보다. 2012년엔 페트뤼스 와인 메이커를 영입했고 코르크 제조에도 심혈을 기울여 부쇼네 비율을 0%에 가깝게 줄였다. 과연, 미국 와인 경매 시장에서 수년간 줄곧 1위를 달린 이유가 납득이 된다. American dream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멋지다. MOMA 의 메인 회랑에 자랑스레 걸린 실존하는 현대 화가의 그림같다.

실버오크는 시그니쳐 라인인 나파밸리의 것과 그 보다 조금 아래 레벨인 알렉산더 밸리 두가지 버젼이 존재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제릭 브룩하이머 작품 속의 주인공들처럼 선이 굵고 진하게 '나대는' 나파 밸리보다 알렉산더 밸리 쪽이 내 취향이다. 그러니까 강력한 무기를 가진 남자와 무기는 그보다 살짝 약하지만 스킬이 좋은 남자 중에서 후자를  선호하는 것과 비슷하다(무슨 뜻이냐고 묻지마라).

전형적인 장기 숙성용 와인의 스멜이 풍기지만 디캔팅이나 에어링으로도 매력을 느끼기 손색이 없다. 탄닌이 내 입 속을 폭풍처럼 찌르지도 않고 2015 빈티지라는 다소 어린(?) 녀석답게 빛깔도 약간 투명함이 감도는 루비빛이다. 풀바디에 가까운 미디엄 바디 정도로 텍스쳐는 찐득하지 않고 꽤 산뜻하다. 실키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구조감이 뛰어난데 전혀 뻐기지 않는다. 식물적 아로마와 동물적 아로마가 아주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얼굴은 동양적인데 신체 구조는 서양적인 그러나 지나치게 볼드한 근육질은 아닌 그런 남자, 세탁이 잘 된 옷을 자연스럽게 갖추어 입었는데 알고보니 죄다 명품. 어려보이는데 실은 꽤 나이가 있는 그런 분위기의 남자, 연예인이나 모델은 아닌데 자체로 은은하니 분위기가 좋은 그런. 악착같은 전교 1등 말고, 이래저래 다재다능한 전교 15등 같은 그런 남자애. 캬, 매력 넘친다. 꼬시고 싶다.

새해 벽두부터 와인 이야기에 아무말 대잔치 하게 한 이 문제적 와인을 고발한다.


작가의 이전글 Lewina's 책일기, 책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