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의 짧은 소설

글렌 모란지

by 서지은

하여간 SNS가 문제야.


윤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혜진이 앤틱한 패브릭 소파 위에 비스듬히 놓인 싱글몰트 위스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을 뿐인데 마음이 이토록 습해지다니. 사진 속 소파의 패턴을 어디선가 본 듯 해서? 집이 아닌 곳, 시간 단위로 방을 빌릴 수 있는 곳, 은밀하고도 편리한 곳. 윤선은 어딘지 알 것만 같았다. 도저히 ‘좋아요’가 눌러지지 않았다. 윤선이 아는 혜진은 싱글몰트 위스키 같은 걸 마시는 캐릭터가 아니다. 피나콜라다나 미도리 사워 같은 달콤한 맛이 나는 칵테일이라면 이따금 홀짝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다. 자신의 계정에 알록달록한 칵테일 글라스가 아닌, 무려 호텔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위스키 사진을 올렸다는 건 이상하다. 게다가 왜 하필 글렌 모란지람. 이수가 좋아하는 위스키란 말이지.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 듯 호들갑을 떤다. 외국에 나가는 지인에게 기어코 사 들고 오게 할 정도. 물론 글렌 모란지야 싱글몰트 위스키 중에서도 꽤 알려진 브랜드고 아드벡이나 라가불린 같은 피트 위스키처럼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종류가 아닌 건 안다, 그치만.


야 성윤선, 대체 너 뭘 상상하고 있는 거야? 설마 혜진과 이수가 애틱 소파가 놓인 룸에서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뜨밤이라도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정신 차려! 고작 사진 한 장으로 거기까지 가는 건 병이야, 병.


이거 정말 병일까?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해 보려 해도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기타 부정맥 환자라 해도 될 만큼 속도도 간극도 제 멋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딩동.


마침 이수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린다. 어쩐지 그가 다른 차원의 우주에 있는 것만 같다. 지구 시간으로는 아주 오래전에 전송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두통 좀 괜찮아? 며칠 아프다 소리 들었더니 걱정 되네. 내가 지금 문병이라도 갈까? 윤선 씨 먹는 약 그 연두색 캡슐 맞지? 투명한 그거 말야. 이름이 뭐였지?


그래, 이수는 그런 남자가 아냐.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윤선의 입꼬리가 하현달 모양으로 올라갔다. 양쪽 엄지를 토독이며 그에게 회신을 보낸다.


지금은 괜찮아. 안 아파요. 그리고 지금 몇 신데 문병을 온다는 거야... 저기 나 이수씨랑 위스키 마시고 싶어. 이수씨 좋아하는 그 위스키요. 글렌 모란지.


글렌 모란지 좋지! 우리 언제 마실까?


이게 벌써 지난 11월에 주고받은 메시지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 공기에서 봄기운이 느껴지는 3월로 접어든 지금까지 이수와 글렌 모란지를 기울이는 일은 하지 못했다. 둘은 대림시장 안쪽의 중국인이 하는 소란한 식당에 마주 앉아 두툼한 만두와 가지튀김에 독한 백주를 마셨고, 도산공원 근처의 줄 서서 먹는 타코 집에서 퀘사디아와 스페인 맥주를 잔뜩 마신 후 근처 호텔 방을 빌려 격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글렌 모란지의 시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윤선은 어쩐지 오랫동안, 어쩌면 이번 생에선, 이수와 엔틱 소파와 글렌 모란지의 조합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란 예감이 들어 또다시 마음이 습해졌다. 혜진은 글렌 모란지를 누구와 마신 걸까? 윤선도 아는 그 장소가 맞는 걸까? 혜진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매번 마음을 접었다. 실은 윤선이 예상하는 대답을 할까 봐 진심으로 두려웠다. 윤선은 아수와 자신의 관계를 아직 그녀에게 말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진에게만은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 시간만 야금야금 흘렀다. 말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찜찜함도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발뒤꿈치의 오래된 각질처럼 버석거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수와 나를, 우리 관계의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하냐는 말이지.


우리 사귀는 사이야.(흠, 그와 내가 사귀는 사이가 맞나? 술도 마시고 섹스도 하고 다정스레 안부도 주고받는 중이니 뭐)


우리 자는 사이야.(뭐라구? 이수와 내가 고작 섹파라니! 맙소사)


우리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 중이야...(으악, 이 무슨 일천구백팔십년대 풍 대사냐!)


오늘도 윤선은 혜진과 늦은 오후의 브런치를 하며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죄다 했으면서 끝내 이수의 이름을 꺼내진 못했다. 엔틱 소파와 글렌 모란지에 관한 질문도. 차라리 이수에게 전화라도 할까? 지금 혜진이랑 같이 있는데 시간 되면 나오지 않을래요? 아님, 저녁에 셋이 한 잔 어때요? 어디 분위기 좋은 바에 가서 우리 글렌 모란지 마셔요. 이수는 과연 나온다고 할까? 혜진과 함께 있는 자리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 내 기분은 참담할까? 차라리 혜진과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냥 만나자고 해볼까? 작년 11월에 말한 글렌 모란지 오늘 마시러 가자고. 푹신한 엔틱 소파가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핸드폰 배터리 잔량이 11%밖에 남아있지 않다. 절전 모드로 바꾸겠냐고 묻는다. 가방에 고속충전기와 보조배터리가 있지만 그냥 만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 <BROWN HANDS>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금속으로 만든 손잡이 위에 PUSH라고 쓰인 나무로 된 문을 민다, 벼랑 끝에 서있는 바위를 밀 듯 느리게 온 마음을 다 해.


여기 위스키 글렌 모란지 있나요?


바텐더가 의아한 표정으로 윤선을 바라본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 거죠? 글렌 모란지가 없나요? 위스키 바에서 우는 여자 처음인가요? 냇 킹 콜이 희미하게 들려 온다.


I know that you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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