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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Dec 10. 2022

레비나의 짧은소설

징크스 전편


현종과 헤어진지 열흘하고 열세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헤어지면 안되는 이유에 관한 장문의 메세지를 스무개쯤 보냈고, 이틀은 현종의 원룸빌라 건물 앞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현종을 붙잡고 울었다. 그가 우는 날 매몰차게 밀어내진 않았지만 실은 알고 있었어. 그에게 나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음을. 그래서 더 처절하게 울었는지 모른다.


현종의 선물로 준비했던 실크넥타이를 박스에서 꺼내 일반쓰레기 봉투에 넣고 종이 상자는 재활용 쓰레기로 처리했다. 하얀 쓰레기봉투 속 아무렇게나 둘둘 말린 넥타이의 푸른 색 패턴이 비닐 바깥으로 희미하게 비쳤다. 횡경막이 욱씬, 동시에 아직은 구원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넥타이가 부러웠다. 헤어진 애인의 넥타이, 저걸 그의 목에 감고 양 손에 꽉 힘을 주는 상상을 한다. 보라색 혈관이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듯 팽팽해지는 광경을. 넥타이 따윌 부러워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네. 넥타이 대신 아직 쓰레기를 채울 공간이 제법 남은 일반쓰레기 봉투 입구를 꽁꽁 묶어 서둘러 내다버렸다.


우리가 지금 헤어지면 안되는 이유에 크리스마스라는 연인들 최대의 이벤트가 있었다. 스무살 이후 서른 두살이 될 때까지 남자친구가 없었던 시기는 거의 없었음에도, 크리스마스를 남자와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출장같은 것과 겹치거나, 공교롭게 남자친구와 심하게 다투거나, 이번처럼 크리스마스를 채 맞이하기도 전에 연애가 종료되었다. 그런 이유로 크리스마스 땐 이렇듯 매번 혼자였다. 이제와 갑자기 친구들을 소환하는 것도 번거로울뿐 아니라, 그녀들 앞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를 주절거려야 하는 것도 짜증스러운 일. 만취 상태로 귀가해 다음날 지옥같은 숙취에 시달리며 어리석은 스스로를 저주할 게 분명하고말고.


됐다, 됐어. 한갓지고 좋지 뭐. 그런 날 밖에 나가봐야 괜찮은 곳은 이미 만석일 테고, 처량한 기분을 지우려 비싼 술집에 가봐야 실컷 돈만 쓰고선 다음날 카드값 영수증을 보며 한동안 자책이나 할게 뻔하잖아. 그러고보니 애인과 함께 마시려고 아껴둔 와인을 따면 되겠구나. 와인샵 세일 때 산 거지만 꽤 좋은 거라구. 나 혼자 마실 수 있으니 개이득. 헤어지기 잘 했네, 잘 했어.


크리스마스치곤 포근한 밤이라 패딩을 걸치지 않았어도 춥지 않았다. 덜컹덜컹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걷다보니 현종과 두번쯤 가 본 적 있는 bar 앞이었다. 음악이 나직하게 흘러 대화할 때 방해가 되지 않아 마음에 들었던 게 기억났다. 두번 다 손님이 거의 없었던 것도. 오늘은 크리스마슨데 그래도 붐비지 않을까? 라는 생각보다 몸이 더  빨랐던 탓에 발걸음은 이미 좁은 계단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가게 한가운데 서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자그마한 전구가 느리게 반짝이고, 재즈풍의 캐롤이 들릴 듯 말 듯 흐르는 가게 안에는 놀랍게도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산타 모자를 쓴 바텐더가 글라스를 정리하고 있을 뿐.


저,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영업시간이 끝난 건지......


인기척에 고개를 든 바텐더 청년의 얼굴에 지붕에 쌓인 눈송이가 툭 떨어지는 정도의 속도로 미소가 걸린다.


괜찮으시면 바 자리로 앉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럴게요.


오늘은 혼자 오셨나봐요.


(응? 날 기억해?) 네... 어쩌다보니.


김렛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걸 드시겠어요?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본 건 그러고보니

이번이 처음이다. 두번 모두 꽤 취해 현종과 함께 왔었고, 구석 자리에서 마냥 서로를 바라보느라 팔릴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김렛의 맛이 준수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달지도 그렇다고 쓰지도 않은, 진이 나긋하게 감도는 김렛. 그런데 내가 김렛을 주문할 걸 어떻게 아는 거야?


두 잔째의 김렛을 비우고 자리를 나서기 전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었다.


김렛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네?


실은 저, 오늘이 이 가게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에요. 그러니까 이 가게에서 제가 만든 김렛을 드신 마지막 고객인 셈이죠.


아, 아니 그래도......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한 잔 더 해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날이 날이라 그런지 한 잔 하고 싶은데 혼자 마시기 좀 그래서요.


함께 15분쯤 걸었을까. 아담한 술집에 도착했다. 중년의 남자가 혼자 하는 술집이었는데 가게 주인과 그는 아는 사이인 듯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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