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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Feb 08. 2021

읽그 56. <100인생그림책>

하이케 팔러, 발레리오 비달리 / 사계절

줌으로, 구글 미트로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가 몇 번 있었다. 그런 플랫폼으로 이야기하는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초반 몇 분은 믿을 수 없이 어색했다. 그 어색함은 무장해제의 다른 말이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보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더 온전히 열어 보인다는 뜻이다. 솔직히 소통할 준비가 된 마음은 도킹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내가 처한 환경의 분위기를 더 예민하게 파악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의무적인 만남에서 더 능숙하게 굴 수 있게 되었을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을 더 오래 만나고, 해야만 하는 일을 더 오래 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건 그렇게 애석해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때 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은 이제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사실 우리는 함께 했던 순간에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을 테고, 단지 떨어져 같지만 다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의 변화를 가까이서 감지하지 못했던 거고, 오랜만에 변하지 않은 모습 속에서 변화를 감지하고 왠지 짧게 슬픔을 느끼는 건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어쨌든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뭐.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왠지 헛헛할 때가 있다. 마음을 달랠 셀프 처방전을 찾다가 다시 한번 읽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100살을 맞은 순간까지, 한 인생을 관통하는 그림책 <100인생그림책>.


누군가의 목소리가 세심하고도 명료하게 '나'에게 말을 건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지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던 아이가 열다섯 살이었던 때를 까마득하게 여기는 스무 살이 되고, 20대 때 작별 선물로 받았던 나무딸기 잼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는 중년이 되었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빈 나무딸기 잼 병을 지하실로 가져다 놓는 94의 노인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노인은 이듬해 다시 나무딸기 잼을 만든다. 몇 해, 심지어 몇십 년의 간격을 두고 짝을 이루는 듯한 그림과 글은 인생이란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길인 듯싶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로 가득 찬 여정임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 어떻게 살아보지 않은 날들에 대해 이렇게 세심하면서도 명료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작가의 말에서 알게 됐다. 이 책이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먹고 자라났다는 것을. 구동독의 기업 책임자부터 시리아의 난민 가족까지, 작가는 여러 사람들이 나눠준 통찰을 이 한 권의 책에 아낌없이 담아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함께 쓴 책인 셈이다. 각각의 삶터에서 물길과 물길이 흘러나와 만날 수 있었던 건 대화의 힘 덕분이었다.




왠지 모를 헛헛함과 단절감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우리는 대화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쓴다는 뜻이다. 짧은 순간 나눈 이야기로 삶의 단면을 파악하고, 조언이나 위로나 격려나 웃음 섞인 말을 나누는 건 멋진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덮는 순간, 나도 그런 기록을 손에 쥘 수 있는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다.


 18 믿을 수 없는 일은 또 일어나. 갑자기 커피가 좋아지는 일이.

(중략)

30 행복이란 상대적이라는 걸 배웠지?

31 그건 아주 좋을 때와 아주 나쁠 때 그 두 경우 가운데쯤에서 가장 잘 자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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