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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Feb 28. 2021

읽그 59. <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지난주부터 작은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산자락을 걷다가 어느새 산비탈에 서있는 매화나무 몇 그루에 꽃이 핀 걸 보았다. 봄꽃은 왜 이파리보다 앞서 돋아나는 걸까. 식물도 마음이 급해 빨리 세상 구경을 하는 거다, 아니면 시행착오일 수도 있다, 사람도 처음부터 척척해낼 수는 없듯이 자연도 마찬가지다.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는 채로 어느 집 담장 너머 산수유꽃이 핀 것을 보았다.


어쨌든 봄이구나.


'어쨌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라는 태도가 연상될 때도 있었고, 실상과 다르게 양쪽 다 만족할 만한 타협점을 찾았다는 착각을 주기도 했다. 그런 착각을 의도하고 싶은 사람이 자주 썼던 말이기도 하고. "어쨌든 OO한 문제잖아."라는 말이 적절한 용례일 것이다. 이전에 공유했던 복잡한 의견 차이를 싹 지우고 자기 입맛대로 문제를 정의할 때 안성맞춤인 마법의 단어, '어쨌든'. 여행용 트렁크에 이것저것 물건을 던져 넣고 잘 잠기지 않는 가방을 억지로 잠가 버리는 사람이 떠오른다. '어쨌든' 길을 나서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왠지 입맛이 쓸 수밖에.


하지만 '어쨌든' 단어 자체에는 죄가 없다.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말이 위치하는 맥락이 문제일 뿐이다. 요즘은 조금 다른 의미로 이 말의 힘을 체감한다. 한 발짝 먼 곳에서 내가 처한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의 힘. 너무너무 힘들어서 두 손 두발 다 들고 싶었지만 '어쨌든' 힘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고, 쌓인 정과 인연에 속기도 하지만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 관계와 인연의 가치가 드러나고, 혼자 헛된 삽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파낸 흙이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발판으로 다져진다는 것. 눈앞에 얽매여있다 보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도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수많은 결점과 부정적인 감정에서 조금은 홀가분해진다.


어쨌든 봄은 오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과거의 나와 과거의 너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떻게든 봄은 와야 하니까, 지난날의 과오에서 눈을 돌려 조금 다른 미래를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단어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는 관점의 차이이자, 행동의 차이를 낳는다. 나에게 일어난 일, 나의 세계를 해석하는 일은 그다음 행동을 위한 포석이다. 칠레의 과거사를 다룬 루이스 세풀베다의 <역사의 끝에서>를 읽으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작가는 코로나19로 작년 봄 세상을 떠났다.


생각이 쉬이 정리되지 않는 것은 질문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은 작가가 꿈꾸는 새로운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용서는 단죄를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난 일에 구속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래서 피해자의 자유를 되찾아 준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결말에 대한 선호를 떠나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이야기(una historia)의 끝이 용서로 끝난다해도, 역사(la historia) 역시 그럴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 같은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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