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아르테
읽고 그리는 하루, 62번째_소설 <달콤한 노래>(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아르테)
달콤한 제목과 그렇지 못한 소설의 첫 문장, "아기가 죽었다." 아이 둘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보모다. 그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나 병원으로 옮겨져 의식불명 상태로 수감된다.
보모의 이름은 루이즈다. 루이즈는 왜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이야기는 아이들의 엄마 미리암이 처음 루이즈를 만났을 때로 돌아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기 시작한다. 첫눈에 미리암의 마음에 쏙 들었던 루이즈. 그는 고용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물론 요리와 청소,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놀라운 힘까지. 루이즈는 나무랄데없는 최고의 보모다. 아이들의 부모인 폴과 미리암은 물론, 루이즈의 요리를 맛본 주변 사람들 모두 그의 진가를 인정한다.
미칠 것 같았던 전업 주부 생활을 벗어나 일을 시작했지만, 사실 미리암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아이들의 사소한 취향과 습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머니과 법조인으로의 정체성 사이 어디쯤에서 미리암이 경험하는 욕망과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루이즈 덕분에 미리암은 불안을 떨쳐낸다. 폴과 미리암 부부는 루이즈가 가져온 다른 차원의 쾌적함에 빠르게 젖어든다. 꽃신의 편리를 깨달은 원숭이처럼, 루이즈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루이즈는 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그리스로의 가족여행에 동행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가까워지면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관계에서 친밀함은 불편함이 되기도 한다. 마냥 루이즈에게 감사했던 폴과 미리암은 어느새 루이즈에게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들 사이의 차이가, 이해할 수 없는 낯섦이 생리적인 거슬림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그에게 의존해왔기에 쉽게 루이즈를 내칠 수도 없다. 이제 루이즈는 마음을 거부당한 연인처럼 그들 부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다른 이들의 내밀한 삶, 그녀는 절대 가질 권리가 없는 내밀한 삶을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었다는 느낌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는 한 번도 자기 방을 가져보지 못했다.(204쪽)
한편 루이즈는 어땠을까. 충격적인 사건과 처참한 현장묘사에서 시작한 소설은 루이즈의 삶을 자분히 되짚어나간다. 야무지게 자신의 일을 해내고, 아이들에게 인내심있게 대하지만, 그의 내면은 사실 놀랍도록 텅 비어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딸은 집을 나갔다. 현재 가까운 이의 부재가 꼭 황폐한 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스스로 지탱할 자기애라도 있다면 역경을 극복하며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즈에게는 무언가로 구축한 단단한 자신만의 세계가 없어보인다. 그의 삶은 고용인과 다음 고용인 사이에서 위태롭게 부유한다. 정황상 루이즈는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빚에 쫓기고, 형편없는 월세방에서도 곧 쫓겨나게 될 것 같지만, 경제적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의 삶은 늘 단절된 방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 사랑이든, 관심이든, 애정이든 타인에게서 넘치게 얻어본 적이 없는 외로운 삶이다. '한 번도 자기 방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말이 그의 삶을 거칠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부부에게 은근한 경멸과 거리두기의 대상이 된 루이즈.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루이즈는 현관을 박차고 나가지 못한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폴과 미리암 가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루이즈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 스스로 삶을 즐길 수 없는 루이즈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자신의 행복을 감히 꿈꾸지 못한채 타인의 행복을 관전하는 삶이란 얼마나 서글픈 것일까.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히 갖지 못하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을까.
심지어 루이즈는 자신이 계속 부부의 곁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주의깊게 주인 부부를 관찰한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찾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몸을 숨길 둥지 하나, 따뜻한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는 것." '우리가 행복하려면 그들이 죽어야 한다'는 이 비뚤어진 생각, 논리의 비약은 이런 욕망에서 자라났다.
자라났을 것이다, 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비록 루이즈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더라도 이 소설을 읽으며 그를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늘만하든 엄지만하든, 구멍 하나 없이 한 인물의 모든 것을 묘사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이를 의미심장하게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이들의 엄마인 미리암이 파리 외곽에서 우연히 차밖으로 지나가는 루이즈를 발견한 장면이다. 미리암은 그 순간 루이즈를 한없이 낯설게 느낀다. 자신이 모르는 환경에서, 알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존재로서 그를 새삼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질문에 미리암은 루이즈가 집에 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은 명백히 알고 있다. 루이즈가 생각하는 '집'은 그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얼굴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 부모, 가족, 친구, 그 어떤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순간이다. 장례식의 추도사를 모은들 그 자체로 고인의 삶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루이즈의 삶의 단면을 모은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어떤 이에 대한 증언의 총합이 삶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 소설이 루이즈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한없이 고독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준 것도 결국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그 무지는 외로운 삶을 더 외롭게 만들 수 있다. 이를 깨달았다면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 역시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