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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Mar 29. 2021

읽그63. <부디, 얼지 않게끔>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읽고 그리는 하루, 63번째_소설 <부디, 얼지 않게끔>(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쾌적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결론지은 게 있다. 혼자서 엄숙하게 마음속에 마침표까지 찍으며 선언한 것. 그건 바로 동네 친구다. 퇴근 삼십 분 전에 갑자기 맛있는 게 먹고 싶어지거나 누굴 만나고 싶어졌을 때 서울 건너편에 사는 대학 친구에게 연락하기는 좀 그렇다. 일단 집 현관에 도킹해야 마음이 넉넉해지는 나는 그제야,


"아, 누군가 만나고 싶은데."


라고 생각하는 일이 잦은데, 이미 연속동작으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난 다음이므로 다시 생활 반경 밖으로 나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때 부담 없이 연락할 수 있는 게 동네 친구다. 걸어서 5분에서 10분 거리에 사는 친구와는 즉흥적인 만남이 가능하다. 상쾌하게 만나고 산뜻하게 헤어질 수 있다. 만남이 불발되더라도 적어도 고민 없이 연락해 물어볼 수는 있다.


역세권, 편의시설, 공원, 적당한 거리에 있는 큰 마트나 시장 등 살게 될 동네를 평가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동네 친구' 항목이 리스트에 추가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괜찮은 동네 친구를 만나자 하루가 얼마나 사소하게 상쾌해지는지, 그런 하루들이 모여 삶의 질이 얼마나 상승할 수 있는지 경험하고 난 다음이었다.






당산과 문래에 각각 사는 두 주인공들. 최근의 경험으로 걸핏하면 '동네 친구'를 부르짖는 나에게는 이 소설의 두 여자 주인공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회사 동료였던 이들이 접점 이상의 교집합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물론 함께 떠난 해외 출장이었겠지만,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인 당산과 문래에 살고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는 더운 게 싫을 뿐인데. 싫은 건 이유 없이 그냥 싫은 건데 사람들은 뭔가 늘 이유가 있고 숨겨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p.77)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행사 직원 인경과 희진은 베트남 사파로 함께 출장을 떠난다. 인경은 가이드, 희진은 경영지원팀 소속 경리 직원이다. 클라이언트의 특별 요청으로 함께 베트남으로 향하게 된 희진은 부장에게 불만을 쏟아낸다. 인경은 희진이 그렇게 크게 반발하는 이유가 유독 더위에 예민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희진이 아니었다. 인경의 이상한 점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희진이었다. 덥고 습해 인솔자며 투어 참가자 모두 힘들어하는 와중에 인경 혼자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것. 인경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온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저 기분 좋은, 주머니 속에 넣어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그런 온기라 느껴질 뿐이었다."(p.126)


예전에는 겨울을 기다리고 여름을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인경은 기억해보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인경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희진뿐이다. 두 사람은 인경의 증상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자료를 찾고, 집 근처 한강공원에서 맥주캔을 부딪힌다. 희진의 조언을 받아들인 인경은 달리기를 시작하며 체력을 기르고, 희진은 인경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제주 여행길에 나선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근육을 기른다 하더라도 앞날이 어떻게 닥쳐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경의 겨울이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던 것처럼. 꼼꼼하고 자분자분하게 이어졌던 이 소설에서 생각보다 큰 보폭으로 나를 놀라게 했던 게 있다면 바로 추위에 인경이 무너지는 모습과 희진과 인경, 두 사람의 관계다. 남들보다 더위를 많이 타고, 남들보다 추위의 충격을 더 극심하게 겪는 너무 다른 두 사람의 우정, 그 우정이 나아가는 모습.


자연스러운 계절의 변화도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두 사람은 괜찮음을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기 위해 한 자리에서 등을 맞대거나, 바깥으로 칼을 겨누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방법으로 고통스러운 계절을 날 수 있도록 돕는다. 희정이 인경이 웅크릴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처럼.


나는 잽을 날리듯 짧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상쾌한 관계를, 그런 동네 친구를 꿈꿨다. 그런 동네 친구와 한 계절 이상을 보낼 수 있다면 이런 우정으로도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어떤 기대감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랐다. 상대에게 그런 상쾌함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상대가 자신의 방식으로 무사히 파고를 넘길 수 있도록 배려할 거라고 믿기에.


그래서 상쾌한 친구가 동시에 은근히 깊은 친구가 될 수 있는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소한 즐거움은 내가 경험하는 세계를 빛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서 가장 와 닿았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봄이 오면 떡볶이부터 먹을 거예요. 맥주 한 캔이랑."(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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