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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pr 21. 2021

읽그65.<초급 한국어>

문지혁 지음 / 민음사

Are you in peace?


미국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진행된 <초급 한국어> 첫 번째 시간. '안녕하세요'의 정확한 뜻을 묻는 외국인 학생의 질문에 지혁은 머뭇거리다 이 한 줄을 칠판에 쓴다. 폭소가 터진다. 평온하십니까? 아니, 선생님. 이건 '스타워즈'에서 요다나 할 법한 말이 아닌가요.


이민 작가가 되는 것이 지혁의 꿈이다. 대학교의 한국어 강사로 초빙되며 이 꿈은 한 발짝 다가온 것처럼 보인다. 정규직 제안도 받는다. 최소한 낯선 땅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긴다. 도착 2년 만에 거둔 성취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지혁의 엄마는 별로 기뻐해 주는 것 같지 않다. 여름의 한복판에서도 엄마는 춥다는 말만을 반복한다.



Am I doing good?

화장실 벽에 OWS, 즉 Occupy Wall Street를 의미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문구를 쓴 사람은 자신들의 투쟁을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싸움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전 세계 인구 중 1퍼센트에 못 미치는 월스트리트의 공룡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대다수가 1퍼센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맞지만, 과연 나머지 99퍼센트가 같은 곳에 서있나. 지혁은 자신의 신분을 읊어본다. '제3세계, 파 이스트 아시아에서 온 (구)유학생 (현)외국인 노동자', 신분증에 적힌 '논 레지던트 에일리언(non-resident alien)'.



지금은 몇 시인가요? 지금은 어떤 시간입니까?

외국인의 입에서 익숙한 자음과 모음이 구르고 섞이며 낯설게 발화되는 시간들. 학생들은 미지의 대상인 한국어에 접근하느라 분투한다. 지혁 또한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에게 한국어 수업은 가장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줄곧 당연하게 써온 한국어뿐만이 아니다. 엄마, 가족, 헤어진 연인. 단어와 단어가 마찰하며 일으키는 분진 속에서 지혁은 자신이 두고 온 사람들을 본다. 자신을 만든 사람과 시간들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은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예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p.128)


시간 또한 해석의 영역이다. 정의를 내리면 그 시간은 나만의 역사가 된다. 물리적이며 건조한 시간이 삶을 바꾸는 특정한 '기점'으로 변하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분기점이 된다. 물론 우리의 언어와 인식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모두 담기에 늘 충분한 것은 아니다. 뭐라 헤아릴 수 없는 뜨겁고, 아리고, 부끄럽고, 억울한 감정을 '죄책감'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인색한 압축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꽤 자주 무력해진다. 잘 지내냐는 말에 잘 지낸다고 대답하는 일이, 정말 잘 지내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잘 지낸다는 대답은 어쩌면 자신의 잘 지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지혁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나도 잘 지낸다는 말을 꼬박꼬박 돌려준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을 닮는다. 그러니 언어가 무력해지는 것은 우리가 무력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력함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지속하는 것 역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생각하는 모습에서 너무 자주 미끄러지면서도 그곳에 닿겠다는 욕심과 열망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지혁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지혁은 소설을 쓰기에는 너무 반듯하다는 평을 들으며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지만, 우리는 그가 아직 소설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지금도 뭐든 해보려고 자리에 앉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차오르는 '안녕'의 시간은 아주 짧게 머무른다. 그 시간을 무한대로 연장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 것이며, 우리는 결핍과 욕망을 여전히 동력으로 삼아 달려간다. 그래서 햇빛을 보지 못해 결핍된 비타민D를 목구멍으로 넘겨주듯, 서로의 '안녕'을 끈질기게 빌어주는 건지도 모른다. 처연해보여도, 미련해보여도 사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의 안녕에 집착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안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없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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