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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와 달 Sep 21. 2018

“다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퐁네프의 연인들


영화 <나쁜 피(Mauvais Sang>(1986)로 레오 까락스와 드니 라방,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를 처음 만났다. 나는 한동안 <나쁜 피>가 보여준 장면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알렉스의 뜀박질은 내 마음속에서 계속 요동치고 있는 듯했다.


<나쁜 피>의 아름다운 한 장면


그렇게 그들을 만난 나는, 이윽고 <퐁네프의 연인들(The lovers on the bridge)>(1991)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영화들은 마음속 불가항력에 의해 이끌려 다가간다. 그렇게 만나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있다. 마치 내 것과 같은 이야기, 소중한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싶은 이야기들.



미셸과 알렉스가 말한다.

“다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폐허처럼 보이는 퐁네프 다리는 우리의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사랑을 잃고 거리를 헤매며 실명을 기다리는 미셸과 미셸과의 사랑만을 간절히 바라는 알렉스, 그들에게 삶은 무겁고 무섭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리에서 사랑을 한다. 그 사랑이라는 것, 그것은 함께 있음으로써 완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명대사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하얗다’라고 말해줘. 그게 만일 나라면 나는 ‘구름이 검다’라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거야.”라는 알렉스의 고백 장면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알렉스가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보다, 그리고 그것의 설렘보다, 사랑을 시작한 이후의 알렉스가 가지는 감정선에 더욱 마음이 머물렀다. 연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집착, 그리고 집착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두려움, 그는 그렇게 사랑에 잠식되어갔다.

그래, 알렉스는 두려웠을 게다.

“나쁜 꿈을 꿨어. 네가 다리를 떠나는 꿈.”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잠식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을 ‘다리’ 위로 스스로 한정 짓고 그 위에서 연인과 유랑하며 지내는 것이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다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로 일순간 무너지기도 한다. 그저 그 다리는 영원할 수 없었을 뿐인 것이다, 누구의 탓도 없이.

미셸이 그를 떠났을 때,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 때, 그는 총을 집었다. 그리고 말했다.

“누구도 내게 잊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은 알렉스가 그때 자신의 목숨을 버렸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알렉스가 죽지 않고, 자신의 손을 쏜 것을 이해한다.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했고 그것이 끝났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산 것 아닐까?

나는 알렉스가 죽지 않은 것, 미셸이 그를 떠난 것, 모두 이해한다. 사랑이라는 관념은 시간처럼 너무 넓어 우리가 미처 다 채울 수 없다. 단지 그것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연인이 지키고자 했던 행복한 다리는 어느 순간부터 녹슬기 시작했다. 세상으로부터 불어온 바닷바람이 너무 차가웠고 매서웠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잠시 다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사실이 많이 아프다. 알렉스처럼 나를 자학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다리로 돌아가고 싶다. 마치 그곳이 내 삶의 마지막 공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다리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으로.




*이 글은 2017년 가을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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