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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와 달 Sep 15. 2018

1. 뿌라와 호세의 집

Que bien~

나는 뿌라(Pura) 할머니와 호세(Hose) 할아버지의 집에 하숙하고 있다.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부터 활짝 열린 미소를 감추지 않던 그들은 정말 친근하고 따뜻하다. 나의 조부모님께서는 내가 학창 시절 모두 세상을 떠나셨는데, 이곳 머나먼 산토도밍고에서 나는 어쩌면 또다른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기분 좋은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어준 나의 스페인어 이름은 ‘끌라우디아(Claudia)’~! 귀엽게는 끌라우디따라고 부르는데 나름 마음에 들어와 이제 여기서 나는 끌라우디아가 되었다. 이름이 바뀐다고 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시작을 가질 수는 있을 듯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맞대는 일은 나이나 국적, 심지어는 언어 너머의 일이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나는 그들의 말을 절대로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아침저녁 서로의 안부를 묻고 주말에 테라스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나의 스페인어 눈치 실력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순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뿌라할머니는 집을 정말 잘 꾸며놓으셨다. 정리하는 일을 좋아하신다고 첫날부터 자부하시던 할머니의 손길이 하얀 벽의 집 곳곳에 보라색으로 피어있다.

바로 옆집에도 할머니의 조카분이 살고 건너편 아파트에도 할머니의 가족분이 살고 계시는데 매일 자제들과 자매 이야기를 해주신다. 뿌리 내린 가족들을 생각하는 것이 노년의 삶의 대부분일까. 결혼과 가정이 늘 연대와 행복을 낳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가족을 많이 아끼는 듯하다. 그녀의 아들은 첫날 나와의 통화에서, “My mother is so sweet.”라고 했다.

 

이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테라스다. 하얀색과 보라색, 초록색들로 싱그러운 이곳은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식사의 공간, 대화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사색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출근 첫 날 아침에 일어난 나에게 뿌라할머니는 커피 한 잔을 주셨고 이곳에서 함께 밖을 바라보았다. 분주함 대신 집밖의 거리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어색했지만 너무나 좋았다. 주말이면 호세할아버지와 이곳에서 한없이 바깥을 바라본다. 그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호세할아버지는 한참을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Que bien~Que bien~(번역하자면, '아이구 좋아라'가 가장 어울릴 듯하다)"이라고 감탄하시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좋다라고 느끼는 기분은 어떤 색일까.

나를 비울 수 있는 공간, 테라스

조금 더 느려지고 싶다. 테라스에서 앉아 밖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아니었다. 이웃집은 안녕한가, 나무들은 건강한 색인가, 오늘 하늘은 어떠한 속도로 흘러가는가를 바라보는 일은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하나의 방식이다. 거리 속 행인과 이웃을 바라보며 나의 생존과 나의 안위만을 위한 급급한 생각들과 걱정들, 나를 재촉하는 행위들을 넘어설 수 있다. 그 껍데기를 넘어 나를 비우는 일,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는 일의 소중함을 배워가는 나날이다. 늘 바쁜 숨을 내쉬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구조 속의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을 이곳에서 개워내고 조금 더 느려지고 싶다.


이제 거대한 짐을 풀어 옷장에 옷을 가지런히 걸었고, 침대 위에는 서울에서 함께 온 나의 인형 '람쥐렁이'도 눕혔다. 람쥐렁이는 애벌레와 다람쥐, 너구리를 모두 섞어 놓은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금 기다란 인형인데 사회의 범주에 넣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어 더욱 매력적인 녀석이다. 자취방에 이사할 때 엄마가 동대문에서 사주셨다. 워낙 이름을 짓기 어려운 녀석이라 그때그때 다람쥐, 너구리, 애벌레라고 친구들에게 소개했는데 호두가 이번에 람쥐렁이라고 붙여줬다. 분홍색, 초록색, 갈색의 천으로 짜져 있는 오묘한 조합의 이 인형은 은근히 친근한 감이 있어 정이 들었고 캐리어에 꾹꾹 넣어버렸는데 들고 오길 참 잘했다 :) 엄마가 정성스레 포장해준 김치(진공포장, 지퍼백, 플라스틱 용기, 뽁뽁이, 신문지로 감싸 터지지 않게 고이 모시고 왔다)와 도라지 무침, 마늘쫑 장아찌, 멸치조림까지 냉장고에 넣으니 드디어 이 낯선 방에 나의 존재를 조금 불어넣은 느낌이다. 물리적 거리와는 별개로 여전히 가깝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 생각한다. 마음의 온도와 색깔은 시시각각 변할지라도 여전히 함께 서로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용기를 얻기도 한다. 이곳에서도 아름다움을 많이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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