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커질수록 주거 안정이 가까워진다는 희망에 가슴 언저리가 너울거린다. 생애를 견인하는 가장 항구한 동력으로 집을 꼽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옆에서 쌍수를 들고 환호의 춤을 추거나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거 안정 이룩하자는 프로파간다를 날릴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면 새 물건을 들여오지 않는 데다가 내 집 외에는 마땅히 필요한 재화가 없는 ‘돈 안 쓰기’에 최적화된 성격 덕에 운만 조금 따라준다면 바로 아파트에도 들어갈 수 있겠다는 큰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온 촉각을 내 집 마련의 꿈에 세운 채로 살다 돌연히 소비를 늘려보고자 마음먹었다.
이게 다 통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극악으로 긴 탓이다. 칼퇴를 하는 날에도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현관문을 연다. 다음날 걱정에 게으름 피울 새도 없이 곧장 잠에 들지만 주말이 되면 완전히 진이 빠지기 일쑤다. 노래를 틀어놓고 멍을 때리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멍을 때리거나 옆구리에 강아지를 끼고 공원에 드러누워 멍을 때리는 등 나는 주어진 시간을 가능한 가장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운용하며 돌아오는 한 주를 달릴 활기를 얻는다. 그런데 본가로 들어온 이후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을 통근하는 데에 쓰며 결핍에 대한 역치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간의 법칙이 효력을 잃었다. 대관절 이 삶에 긍정할만한 것이 있기는 하는지. 이를 가늠하는 일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버거운 일상에 매몰되어 갔다. 더 이상 낭만이 부재한 시간 위에서는 단 한걸음도 내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차원적인 처방을 써 보기로 한다. 행위로 옮기는 일이 자주 있지 않을 뿐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선택지 중 마음이 가는 물건을 취하는 일은 늘 즐거웠다. 그럼 어디 한 번 행복을 사 보자.
삶을 상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비겁한 선택을 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순간에도 마음 한 켠에는 선명한 윤곽을 가져보겠다는 열망 하나가 가지런히 몸을 뉘이고 있었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좀 어떠냐고 자문하고는 곧장 적籍을 버리기도 했으니 대단한 신념이랄 것은 없으나 선명함의 가치를 지침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이야기다.
자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다가도 모르겠고 맞다가도 금방 틀리지만 그래도 하나 확언하는 것이 있다면 대체로 불행하고 가끔 행복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삶에도 대단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인생은 원래 허무한 것 아닌가. 다만 그 허무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라 인간의 소명이라고, 적기에 제동을 걸어 무난하게 마음을 썩이고 기쁨이 허락된 때 누구보다 천박하게 웃고 싶다. 한 달에 한 번이나 쓰면 다행일 이 소비 기행은 스스로의 층위를 조금 더 첨예하게 들추어 본 기록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마음에 집을 지을 생각이다. 행복한 것들을 잔뜩 초대하고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