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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Feb 17. 2017

하루를 1쇄를 찍듯이

29쇄 by 임소라

가끔 회사에서 업무를 보다가 잠깐 짬이 나거나 시간이 남으면 난 버릇처럼 인터넷 서점을 기웃기웃 거리는 취미가 있다. 이 취미는 장바구니를 심하게 늘린다는 안 좋은 부작용이 있으며, 더 심할 때는 내 돈을 가져가요! 하며 늘어날 대로 늘어난 장바구니의 결제 버튼을 클릭하게 만드는 것 말고는 요즘의 출판 동향을 알아보는 척도로 내가 애용하는 방법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것저것 눌러보며 구경하고 있을 때, 강렬한 색깔의 표지, 그리고 책 제목이라기엔 조금은 이상한 제목의 책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29쇄라니, 책이 벌써 29쇄를 찍었다는 거야? 그런 책이 있는데 왜 내가 몰랐지? 나의 무지함을 탓하며 책을 클릭했다.





책에 관심 있지 않고서는 쇄(刷)를 잘 알지는 못할 것 같은데, 제목이 29쇄란다. 


제목을 29쇄로 정한 데에는 나를 20일 동안 스물아홉 번 찍은 기록이라서, 또는 이 책이 물리적으로 29쇄를 찍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는 이 책의 판권 어디에도 29쇄라는 글자가 찍힐 일이 없다는 걸 우주의 기운을 통해 알 수 있기에 차라리 제목으로 찍어버리자는 객기로, 또는 발음이 29세와 비슷하니까 등등의 의미가 있다.


제목부터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 셈. 29쇄를 찍기는 정말 힘들지, 요즘 같은 출판계의 상황으로서는 29쇄는 무슨, 5쇄만 해도 박수칠일일텐데. 29살의 여자가 29일 동안의 일기를 묶은 이 책의 저자는 이미 여러 권을 집필한 독립 출판계의 인기 작가였다. 이 책이 벌써 6번째 책이라니 말 다했지. 여태까지의 책들은 자신이 직접 프린트해 엮고 묶어 바느질해 팔았던 독립출판물이었다고 한다. 


29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많은 이야기로 채워질 수 있다니,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고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특별하지 않아도, 근사하지 않아도, 작고 소소한 이야기가 우리 인생에 매일매일 쓰여진다는 것, 그것을 그녀는 매일 쓴 29일의 일기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도 이렇게 작지만 소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을 텐데, 그것을 끌어내어 이렇게 글로 기록한다는 게 저자와 보통 사람들과의 다른 점일 것이다, 


그녀의 글 쓰는 스타일은 분명 일기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일기가 영상화되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읽히는 것뿐만 아니라 영상같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 있는 글. 그래서였을까, 더 공감할 수 있었다.


일기라는 것이 보여지는 용도라면 나의 좋은 모습, 예쁘고 반짝반짝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텐데, 저자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도,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글로 써내 보인다. 보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짜 이야기를, 그녀의 일상을 읽는 것 같았다. 진짜 그녀를 알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고 꾸밈없는 말투로 자신을 내보이기때문에.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일상적이지 않고 평범하지 않다.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모조리 반납한 직후, 나는 서가로 가서 또 책을 골랐다. 결국 읽지 않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일을 2주 간격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알을 못 낳는 닭이라도 된 심정으로 이번엔 어떤 책을 2주간 품어볼까, 하면서 서가를 서성거렸다. - 결국 읽지 않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일


어쩜 이리 나와 똑같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책값을 세이브하는 거니까 공공 도서관을 더 자주 애용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서는 열심히도 책을 고른다. 3-4권씩을 낑낑대고 들고 와서는 반납일에 맞춰 그대로 돌려드리는 일을 지금 몇 달째 하고 있는 건지... 집에 있는 아직 읽지 못한 책만 먼저 읽어도 몇 달이 걸릴 텐데, 책 욕심은 왜 그리도 많아서 그렇게 주기적으로 도서관에 가는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아니, 어쩌면 영영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나마 나랑 비슷한 사람이 이 지구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이 된다.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아이고! 출근하세요? 아이고! 여자예요, 남자예요? 라며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을 건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은 예예, 하고 즐겁게 대답을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갈 것이며, 간혹 사람 놀라게 왜 갑자기 말을 거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초배는 화를 내는 사람에 속한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길 가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인사하고 말 거는 건 얼마간 놀라고 이상한 일일 텐데, 어떤 상황이든 개라면 모든 사람을 반가워하고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째서 당연한 걸까. - 하지 마세요, 쪼쪼쪼


이 세상에는 일반화된 오류가 너무나도 많다. 저자의 개는 예민해서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데, 길가다가 쪼쪼쪼 하며 이리와 보라고 손짓하고는 개가 짖는다고 욕설을 하던 공사장 인부들을 향해 저자는 저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 완벽히 똑같은 사람은 없는데, 하물며 개들이라고 다를까. 우리같이 말하지 못한다고 동물들을 일반화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예민한 개도 있고, 친근한 개도 있고. 예민한 사람도 있고, 친근한 사람도 있는 건데.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내 논리대로,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만 추구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짧은 글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오늘 막 도착한 두 권에 크게 바라는 건 없다. 그의 책들을 몇 주간 몰아 읽는다고 해서 카뮈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이번에도 한 페이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는 카뮈를 쳐다보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책이든 영화든 기대하고 시작하면 뭔가를 꼭 얻어야 한다는 괜한 의무감에,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걸 놓치고 만다. 그저 한 줄이면 된다. 내가 저 한 줄 때문에 카뮈를 다시 찾게 되었듯, 카뮈의 책에서도 다음 작가로 건너가는 한 줄만 만나면 된다. 계속해서 다음 책을 찾게 할, 다음 작가로 갈아타게 할 한 문장이면 된다. - 환승의 문장


나도 한 작가에 꽂히면 그 작가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하루키가 그랬고 다른 영미 작가들이 그랬다. 그러다가 어떤 한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환승의 문장'을 만나면 다른 작가로 갈아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루키에서 레이먼드 카버를 발견한 것처럼,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 카뮈를 만나게 된 것처럼, 내게도 환승의 문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무모하게 믿었던 시절, 단순히 읽은 책 권수에만 집착해서 많은 것을 놓쳤었던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문장을 곱씹고 나를 다음 책으로 데려다 줄 환승의 문장을 기다리며 읽는 즐거움을,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난 철저히 내 이야기만 쓰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사람, 여전히 나를 위해서만 쓰는 사람이었다. 내 안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서너 명은 충분히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때마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어른이 되었나 눈물이 핑 돌았다. 울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해 우는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서밖에 울지 못하는 사람, 내가 너무 힘든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아플 때마다 번거롭게 우는 일 없이 그럭저럭 견뎌내는, 내 아픔만큼 남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 이쯤 되면 그럴 거라고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글이다. 십 대의 내가 상상했던 서른의 나는 되지 못했다. 스무 살 때 상상하고 바랬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난 아직도 겁이 많고 소심하며 남들을 위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끔은 정의를 보고 눈감을 때도 있고, 옳은 방법보다 쉽게 가는 방법을 택할 때도 있다. 이 나이쯤 되면, 아픔에도 조금은 무뎌지고 남의 아픔에도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엄살만 심해지고 내 상처만 봐달라고 칭얼대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내 안에 내 사람들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를 품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내 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싶었는데, 내 이야기만 들어달라 투정 부리며 쓰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녀의 차갑도록 솔직한 글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39쇄의 그녀는 조금은 달라져있을까.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변하기는 할까. 변할 수 있을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나에게 "이쯤 되면 그럴 거라고 여겼던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내 것이 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아픈 곳을 쿡쿡, 눈물 나도록 찔러댔다. 맞아, 이 나이쯤 되면 사랑도 일도 아주 멋지게 해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 현실은 그게 아니다. 여전히 어설프고, 넘어지고, 또 아프다.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응,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최선을 다했어?"
"아마도."
"행복해?"
"가끔은."


결국, 이렇게 되었다 해도 최선을 다했기에 가끔은 행복한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지. 39쇄, 49쇄에는 더 나은 내가, 그녀가 되어 있을 거라고 믿어야지. 지금의 내가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미래의 내가 그래도 가끔은 행복하다고 말해줄 수 있도록 살아내야지. 


하루하루가 모여서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서 반짝거리는 시간이 된다.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살고 싶다. 1쇄, 1쇄 거듭 찍어내면서 내 인생이란 책이 더 빛날 수 있도록. 

더 많은 목차와 더 많은 페이지를 가진 멋진 책이 될 수 있도록. 그것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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