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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Feb 10. 2017

다 잘될 겁니다

쓸 만한 인간 by 박정민

배우 박정민의 첫 산문집. 사실, 잘 알고 있던 배우는 아니었는데, 이번에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선생님 역할을 맡았다고 책에 쓰여있었다. 그래도 영화 <동주>를 아직 못 봐서 누군지 몰랐다. 난 사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고, 또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영화 <파수꾼>의 홍보용 블로그에서 비하인드 에피소드들을 연재하다가, top class 라는 매거진에 칼럼까지 쓰게 되면서, 그 글들을 모아 이번에 책으로 출판된 연기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팔방미인이었다. 배우가 글을 쓴다, 하나만 잘 하기도 어려운데 두 개를 다 하면서 호평을 받는다니, 얼마나 잘 썼나 한번 보자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영화 <동주>의 이미지로만 생각을 해서였을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재밌으면서도 약간의 똘끼로 무장한, 어쩔 때는 조금 찌질하기까지도 한 글들로 가득 찬 책이라는 것. 첫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몰랐던 배우가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동네 남동생이 된 듯한 느낌. 박정민이란 배우에게 칼럼을 써보라고 권유한 기자님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요지는 책을 읽자는 거다. LCD에서 반짝거리는 글자와 책 속에 진득하니 박힌 활자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책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는 배우가 되기 위해 고려대학교를 자퇴하고 한예종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지만 면접에서 쓴 고배를 마신 후,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본 후 1년 후에 그 학교에 합격했다. 19년 동안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원하는 예술학교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1년 동안 미친 듯이 책과 영화를 섭렵해 결국은 입학을 하고야 말았다. 책 읽기를 통해서 변화를 체험한 저자는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조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또 많이 읽었지만, 미국에 이민 오고 난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랴, 공부 따라가랴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책을 살 곳도 마땅하지 않았고, 책을 주문하기에는 무거운 무게 덕에 배송료가 너무 비싸게 붙었던 터라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책들만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으니, 나중에는 다 아는 내용을 또 읽으려니 너무 지겨워 책을 안 읽었었는데. 답답했었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은 핸드폰 스크린, 또는 컴퓨터 스크린으로 흐르듯이 훑어보는 것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활자가 하나하나 박힌 종이에서 나누는 책과의 교감은 어느 기계의 스크린으로도 얻을 수 없다. 책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 틀린 말이 아니기에 몇 번을 말해도, 말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지금 함께 북클럽을 하고 있는 친구들도 책을 이렇게 많이 읽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 달, 한 번씩 모여 몇 시간동안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그 시간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책을 챙겨 다니고 책을 가까이 하는 모습에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구나.


사실 빨리 서른 살이 되어보고도 싶었다. 서른쯤이면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열심히 산다고도 살았다. 소신도 있고 신념도 있고, 그것들을 크게 배신한 적도 없었다. 유혹이 있을 때마다 넘어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도 같다. 그런 고집들이 나 자신을 점점 땅 속으로 꺼지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들을 굽힐 의사는 없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고, 소신과 신념만 남은 다 큰 어린아이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 인생, 돌아보니 후회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은 아마 이 지구상에서 없을 것이다. 열심히 매사에 최선을 다했고, 나의 가치관에 맞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돌아보면 내가 성숙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늙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지. 겉 껍데기는 나이 들고 늙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 하나가 쭈그려 앉아있는 것 같은지. 아직도 내 속 안의 어린아이는 열 일 곱살 같은데, 겉모습만 서른이 넘은 나는 가끔 회의감에 젖는다. 그래도 그렇게 느끼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연기를 해보겠다고 극단에 들어간 2005년. 극단 형과 함께 포스터를 붙이다가 가슴에 꽂히는 한마디를 듣게 됐다.
"너 같은 놈 많이 봤어. 발 좀 담그는 척 하다가 다 없어져."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지만 그 형이 싸움을 잘해서 참았다.


에세이집을 읽다 보면, 가끔씩 비슷비슷한 문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쓸 만한 인간>을 읽을 때는 아, 또 그런 내용인가, 하다가 훅 들어오는 어퍼컷 같은 문장들에 반가운 마음이 들며 웃기까지 했으니, 즐거운 독서였구나. 자연스럽게 술술 읽히는 것과 동시에 재미까지 있으니, 계속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오랜만에 들었던 책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흔한 미사여구 하나 없지만 그 안에서 살가움을 느낄 수 있는, 꼭 오랜 친구의 일기장을 펴 보는 듯했다. 화이팅하세요! 라고 힘차게 외치는 응원이 아닌, 지친 어깨를 잠시 토닥여주는 오래된 친구의 위로 같은 글들이 뭉클하고 따뜻했다.


수첩에 적힌 이상한 글자들이 지금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스물다섯 살의 내가 스물여덟 살의 나를 위로한다. 동생 주제에 꽤나 위로를 잘한다. 가끔씩 느끼는 큰 감정의 요동을 글자로 남겨보길 바란다. 그중 8할은 훗날 보면서 쌍욕을 퍼부을 글자들이지만 그중에는 분명 나를 세워주는 글자가 있을 것이다.


나도 다이어리를 써야지, 하고 1월에는 빽빽이 매일을 몇 글자라도 채워나가다가, 한 달이 지나가면 슬그머니 펜을 내려놓게 된다. 예전에는 줄곧 잘 써왔었는데, 왜 이리 게을러지는 건지. 그래도 몇 년 전의 다이어리를 슬쩍 펼쳐보면, 그 안의 조금은 어렸던 나에게 위로를 받는 순간이 온다. 이상한 헛소리 써놓은 것에 한 번 웃게 되고,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는 그랬었지, 하며 지나간 사랑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그런 많은 글자들 안에 나를 세워주는 글자가 있기에.


대학교 다닐 때 썼던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그 날에 어떤 클래스를 들었고, 숙제는 뭐가 있었으며,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얘기를 했고 누구와 함께 보냈다는 소소하고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얘기들이 가득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면 그때의 나, 감정이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요동치던 내가 떠오른다. 그래, 그때는 그게 세상의 끝인 줄 알았지, 내 눈물이 흐르다 흐르다 쏟다 못해 말라버리는 줄 알았지. 길 가다가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을 흘리고, 이 세상 모든 슬픔이 내 것인 것만 같아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던 내가 있었지. 그렇지만, 그래도 여기 살아있다. 그래도 살아졌고,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 감정의 요동침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를 받는다. 그의 말이 맞았다.


비록 지금 당장은 힘들지라도, 스스로를 얕보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는 모두 "쓸 만한 인간"이니까.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도 앞으로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직구만 던지면 얻어맞기 일쑤니, 적절히 변화구도 섞어 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 사는 데 9회말이 있는가. 역전패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길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당신은 지금 아주 잘 하고 계신 거다.


쓸 만한 인간이라, 이 책은 읽는 내게 질문하게 만든다. 나는 쓸 만한 인간일까? 저자의 배우 생활을 그의 목소리로 읽어내려가며 나의 지난 시간들도 돌아보게 된다. 저자는 독립영화에, 연극에, 드라마에, 가리지 않고 기회에 감사하며 차곡차곡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간다. 당연히 힘들 때가 많고 어려움에 닥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묵묵히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름도 몰랐던 배우였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의 연기도 그의 글처럼 분명 투명하고 유쾌한 빛을 띌 것에 확신한다.


나의 삶에는 9회말도, 역전패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내게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그냥 헛살면 안 될 것 같은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하루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는 조건들일수도 있으니, 나 지금 이대로도 잘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계속 살아간다면, 나도 변화구를 던질 수 있을까. 응, 던질 수 있을거야.






당신 지금 아주 잘 하고 계신 거다, 쓸 만한 인간이다, 다 잘 될거다, 당신은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지 못하고 내딛는 발걸음들이 조금은 더딜지라도 지금 아주 잘 하고 있다고, 당신은 쓸 만하다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얘기해준다면 그 동안의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퍽 괜찮은 인생을 살았고, 살고 있구나 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투적인 인사말이지만 그래도 힘이 될 테니까. 위로가 될 테니까.


잘 될거에요.

당신 지금 아주 잘 하고 계신 거예요.

결국엔 다 잘 될테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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