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타나 살레츨, 후마니티스, 2014
자기 계발서는 더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 자기 계발서가 이룬 실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이런 책들은 불행을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中, 레타나 살레츨, 후마니티스, 2014
모든 장르의 책을 고루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하나의 예외를 둔다면 자기 계발서만큼은 피한다. 중학생 때는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 계발서가 더 이상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불쾌하다.
한 공간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개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같은 문제를 갖고 있더라도 살아온 환경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고통을 체감하는 정도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계발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들도 다 힘든 일을 겪는데, '고작' 그런 일로 힘들어할 거야?"
내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갈 자극을 주었던 자기 계발서들은 어느 순간부터 똑같은 말을 어순과 단어만 조금씩 변경해 반복하는 활자에 불과해졌다. 살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가족조차 나를 모르는데, 활자 너머의 당신은 어떻게 내가 '게으르다'라고, '노력하지 않았다'라고 단정하는가.
자기 계발서가 아니더라도 이미 온 사회가, 모든 미디어가, 소위 말하는 어른들이 우리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자꾸만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너 얼마나 노력했니?', '남들은 더 힘들고, 우리 때는 더 힘들었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 알고 있는 내 나름의 고민과 노력에 대한 마땅한 예우를 미루게 된다.
고민과 노력의 시간에 대한 예우는 결코 적당함의 추구나 게으름이 아니다. 쉴 수 있는 시간과 스스로에 대한 격려는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나는 쉼 없이 살고 싶지 않았다. 내게 언제나 지금보다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결과를 요구하는 주변 상황에 지치고 좌절할 때 나의 내부에서 문제를 찾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사회의 기대에 순응해 모든 문제와 좌절을 나 스스로에서 찾는다면 언젠가 나는 내가 느낀 불합리함으로 타인을 심판할지 모른다. 아무도 모를 누군가의 아픔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내가 했으니 당신도 하라는, 내가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버텨왔으니 당신도 똑같이 버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내게 요구하는 쉼 없는 달리기를 완주하고 싶지 않다. 내가 놓친 것들을 생각하고, 나아갈 길을 생각하며 걷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길과 방식이 있다. 일륜적인 잣대로 '더' 노력할 것, '더' 엄격할 것, ''덜' 쉴 것을 강요하고 회초리질 하고 싶지 않다.
오늘도 당신의 삶 속에서 나름의 축을 잡겠다고 고군분투한 당신을 위해, 레타나 살레츨이 전하는 한 마디를 건네고 싶다.
모든 것이 개인에게 달려있다면 우리는 치유 과정이 실패할 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도서의 원문이 나온 표현 ‘자기 계발서’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