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자신의 꾸중에도 딸이 속상한 기색 하나 없이 무덤덤하자 아버지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82년생 김지영 中, 조남주, 민음사, 2016
11월 중순. 조남주 작가와 박혜진 편집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김지영을 공론화한 저자, 김지영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편집자 그리고 수많은 김지영이 만나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은 살면서 겪을 수 없는 몇 없는 기회였다.
김지영은 우리의 모습이다. 독자들이 김지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은 그녀가 일반적인 대한민국 여성이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서울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남편과 유치원생 딸과 함께 사는 전업주부 김지영 씨의 이야기다. 큰언니와 막내 남동생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나, 할머니의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하고, 중·고등학교에 들어서서는 같은 반 남학생의 장난을 빙자한 성희롱, 남자 교사의 체벌을 빙자한 성희롱을 겪으면서도 이를 '장난'으로, '체벌'로 묵과해야 했던 평범한 여성. 남동생에 대한 엄마의 은근한 차별과,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은 출산과 동시에 단절되는 흔한 여성들 말이다.
김지영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 화자 되는 이유는 이 모든 모습이 세부적인 내용만 다르고 본질적인 경험은 같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그렇다. 중학생 때 같은 반 남학생 몇 명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치마 속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자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은 당황한 표정 대신 미소를 보였다.
이후로 나는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치마를 입으나 반바지를 입으나 속바지를 꼬박꼬박 챙겨 입는다. 아마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가해자는 잘살고 있는데 피해자는 8년도 더 지난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불편함을 감수한다.
철없는 중학생의 실수라고 말한다면,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성인이 된 이후 친한 지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는 피하고 있다. 원체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기지 않아 자주 참여하는 편도 아니었으나, 손에 꼽는 기억에도 좋은 내용은 없었다. 술에 취한 모습이나 시끄러운 소리 등을 말하는 건 아니다.
술자리마다 내게 은연중 요구됐던 인내심이 못 견디게 싫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어깨나 팔, 허벅지 등 신체 부위를 은근슬쩍 만진다거나, 불쾌한 차별적 언사들을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감수해야 했던 일들이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실수 혹은 장난으로 넘기며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싫은 티 하나 못 냈던 술자리들이 말이다.
자꾸만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었고, 이런 게 괴로웠다고,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공감하는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얌전히' 있으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기에는 필자가, 필자의 엄마가, 언니가, 지인이 겪은 일들이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60년대 엄마의 이야기이고, 90년대 자매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21세기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조남주 작가는 17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17년생 김지영」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가 '여성'이라 겪는 일이 아니라 단지 그 세대가 공유하는 고민, 그 개인의 고민을 담는 이야기가 희망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얌전히' 변화를 기다릴 수 없는 단 한 가지 이유를 꼽자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대를 아우르는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란다. 미래의 김지영은 단지 가감 없이, 제한 없이, 진솔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