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y 14. 2020

딜러와 시장의 바다

상어에게 먹이를 나눠줘라

너도 읽었겠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 말이다. 혹시 아직 못 읽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서 읽어보렴. 우리 시대의 고전(古典, Classic)과 네 세대의 고전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금방 읽어진다. 아빠랑 친한 기자인 수연 형님이 특히 좋아하는 책이다. 가끔 술 한잔 하면 산티아고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불굴의 의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답잖은 놈들의 태클이나 현재의 역경을 이겨 내자면서 말이지. 스토리라인은 알다시피 심플하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낚지 못했던 산티아고는 85일째 되던 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엄청나게 큰 청새치를 사투 끝에 잡는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들에게 물어뜯기고 말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안겼던 작품이다. 언제 읽어봐도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노인은 온갖 고통을 억누르고자 애썼다. 자신의 남은 힘과 과거의 자존심까지 다 기억해 내고 물고기가 던져 준 극심한 고통과 맞섰다. 마침내 물고기의 주둥이가 뱃전에 닿을락 말락 하며 노인의 곁으로 천천히 헤엄쳐 오더니 그대로 배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크고 긴 몸통에 넓은 자줏빛 줄무늬가 선명하게 보였다. 온몸이 온통 은빛으로 보이던 그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배를 지나쳐 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은 손으로 잡고 있던 낚싯줄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 드디어 작살을 높이 쳐들어 있는 힘을 다해서 아니 지금까지 써 왔던 힘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힘을 내서, 물 위로 드러난 거대한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를 내리 찔렀다. 


젊은 날 이 책은 삶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라 읽혔지만, 마흔 중반에 다시 읽는 이 소설은 자본시장에서 겪은 경험을 더하게 되니 좀 다른 측면들이 보인다. 마치 딜러들의 시장에 대한 투쟁처럼 읽힌다. 시장에서 싸우는 딜러들은 이런 경험들을 하루 안에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수년에 걸쳐서 겪기도 하지만 어쨌든 반드시 한 번은 하게 된단다. 우리는 영광의 순간, 다시 말해 큰 수익을 얻기 위해 산티아고처럼 찢어지는 손바닥을 참아내고 때로는 온몸으로 버티기도 하고, 날생선을 씹으며 인내했을 테지. 그 과정에서 외로움은 또 큰 난관이기도 하다. 


 노인은 더 이상 그 큰 물고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물고기가 뜯길 때 노인은 마치 자신의 살점이 뜯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물고기를 물어뜯은 상어를 내가 죽였어, 노인은 생각했다. 그놈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큰 마코상어야. 사실 나는 큰 놈들을 많이 보았지. 

 이렇듯 엄청난 행운은 오래갈 리가 있나, 노인은 생각했다. 온 힘을 다 쏟아 부어 물고기를 낚은 일조차 꿈이었으면 좋겠다. 신문지를 깔고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노인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하지는 않지."


그 영광을 남들에게 자랑할 새도 없이 상어들에게 잃고 마는 순간은 없었을까? 좋은 일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그리고 허망함. 그럼에도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하지는 않지."(이 문장이 아마 이 소설의 핵심이지 않을까?)를 되뇌며 마지막까지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아빠가 딜러였을 때도 상어를 만나는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그땐 시장 탓, 혹은 남 탓을 하기도 했었고, 혹은 '만약 ~'이라는 가정법으로 나를 속이기도 했었지. 그때의 경험으로 본다면 역시 첫 번째 상어가 중요했다. 산티아고가 첫 번째 상어를 맞아 용감하게 작살을 깊숙이 찔러 물리쳤으나 청새치의 꼬리 부분을 물어 뜯기고 만다. 흘러나온 피는 이제 더 많은 상어를 불러들일 게 뻔했을 때 과감했어야 했다. 리스크관리 측면에서 본다면 이때 청새치를 분해했어야 한다. 어차피 너무 커 배에 실을 수 없었던 청새치를 과감하게 좋은 부분만 잘라서 배에 올리고 나머지는 상어들에게 줬어야 했다. 그런데, 계속 수익을 끌고 가겠다고 몰려든 상어들과 싸우느라 칼마저 부러지고 만다. 더 이상 상어들과 싸울 무기가 없어진 것이다. 시장에서는 눈앞의 수익에 혹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혼자서 수익을 다 먹으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네가 딜러가 된다거나(현재까지의 너를 봐서를 절대 그럴 일이 없어 보인다.), 혹은 금융시장에서 달려오는 행운의 앞머리를 움켜쥐어 기대 이상으로 돈을 벌었다면, 욕심을 버리고 리스크관리를 잘하기를 바란다. 금융시장이라는 바다에서 상어를 만나거든 산티아고처럼 어리석게 모든 상어와 맞서 싸우지 말고 핵심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떠올리고 과감하게 나눠라.  


소설에서처럼 사투가 벌어지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해 내기는 사실 쉽지 않다. 그래서 금융기관에는 Front Office(딜러)와는 별도로 Middle Office(리스크 관리자)가 존재한다. Middle Office는 상어를 감지하고, Front의 딜러들이 상어에게 둘러 쌓였을 때, 그래서 이익이 급감하거나 손실이 커질 때, 잘라야 할 선을 정확히 지정하고 지키게 만든다. 돈을 잘 벌던 딜러들도 개인적으로 독립하거나 몇몇이 모여 소위 말하는 부띠크를 차렸을 때 리스크관리에서 제일 힘들어한다. 처음에는 잘 지키지만(수천 번 그렇게 다짐한다.) 상어에게 한쪽이 물어 뜯기면 더 이상 어떻게 하지를 못해. 행동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손실에 대한 민감도가 0% ~ -10% 정도까지는 굉장히 민감하게(다시 말해, 위험회피 성향으로) 반응하지만, 넘어서면 달라진다. 같은 10% 차이지만 손실 -30%와 -40%는 차이는 거의 다르지 않다고까지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다시 손실이 -70% 수준에 다다르면 이후 손실 -100%까지는 또 민감도가 증가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비이성적 판단을 최소화하고 냉정하게 조치를 취할 장치가 필요한 것이지. 예를 들어, 손실한도를 -20%로 정했으면 무조건 정리하게 만든다. 설령 회복을 확신하고 다시 포지션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5일간의 사투로 힘이 빠진 노인이 바다 위에서 청새치를 혼자 분해하기도 힘들고, 혹시 정말 청새치를 분해하고 리스크관리 들어갔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겠지. 노벨문학상도 당연히 생각할 수 없다. 어쨌거나 이 소설이 딜러들의 상황처럼 읽히는 건 아마도 최근 몇 년간의 금융시장의 어려운 상황들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렵게 끌어 모은 그간의 수익을 금리나 환율, 가끔은 급증하는 부도율이라는 상어가 올라오며 속수무책으로 이익이 뜯겨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산티아고 같은 딜러들이 많이 있었다. 금융시장에 위기감이 짙어지면 시장이 얇아진다.(매수세력과 매도세력이 몇 남지 않고 사라질 때 이렇게 표현한다.) 그럴 때는 작은 물량에도 가격이 급변동한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반대 포지션의 숫자들을 바라보면 정말 공포스럽다. 더욱이 최근에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초단기 시장을 주무르면서 변동성이 더 커지고 말았어. 아빠가 상어처럼 대규모 선물 매도를 쌓아두고 남의 이익을 씹어 먹던 적도 있었다. 또 한순간에 반대의 경험도 했으니 어떤 느낌일지 잘 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모두 산티아고와 같은 순간들을 겪는다. 시장의 딜러이든, 아니면 진짜 어부이든, 조그만 식당을 하는 자영업자이든, 그냥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든 누구에게나 영광의 청새치가 있고, 그것을 물어뜯는 상어가 존재한다. 단지 잡은 물고기의 크기와 상어의 출현 빈도만 달랐을 뿐이지. 삶의 영광(어쩌면 영광까지는 아니고 단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을 위한 노력과 성취, 그리고 그것을 물어뜯는 상어와 같은 존재들과의 쟁투. 그렇게 얻은 것들을 거의 다 상어들에게 물어뜯기고서 만나는 허탈한 순간들. 무슨 일을 하든, 또는 무슨 꿈을 꾸든 어쩌다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선 산티아고처럼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은 결과가 무엇이든 결코 패배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이 영원한 고전으로 남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네게 청새치는 무엇이고, 또 상어는 무엇이니? 


아빠는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지 커다란 청새치를 꿈꿔본 적도 없었고 작은 고기라도 잡아 먹고살려고 발버둥 쳐야 했다. 그럴수록 아빠 주위에는 물고기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어만큼은 늘 우글거렸다. 어쩌면 큰 청새치를 꿈꾸지 않는 자가 상어를 더 많이 만날지도 모른다. 만만해 보이니까 쉽게 상어들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한편, 금융시장에서의 상어는 잘 살펴 보면 결국 방심, 자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지와 오해들이다. 그런 것들이 어렵게 얻은 성취를 무자비하게 뜯어 간다. 그래서 오히려 싸워 볼 만하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버틸 수 있다. 반면, 삶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 아빠가 젊었을 때는 사실 아빠에게 인생의 청새치와 상어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단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아빠가 잡고 싶었던 청새치는 늘 '자유'였다. 돈으로부터, 관계로부터, 수고로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이기심, 혹은 의심이라는 상어를 만들어 내고, 나의 시간과 마음을 갉아먹는 상어 같은 관계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나 오히려 수많은 관계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고, 수고로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나 그 수고로움을 견뎌야 자유를 조금이나마 얻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역시, 삶은 기대한 것과 다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