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페셜-화이트 크리스마스(KBS, 2011)
크리스마스다. 사람들과 만나 행복하게 놀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는 때다. 무조건 약속을 만들어야 할 것 같고, 혼자라도 치킨과 맥주, 그리고 <나 홀로 집에>의 ‘케빈’ 정도는 함께해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번잡한 인생사에 초연해지면서 크리스마스를 ‘남의 생일 따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순 있겠지만, 어쨌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조금이나마 즐겁고 보람차게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이때, 크리스마스와는 아이러니한 작품이지만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2011년 KBS <드라마 스페셜> 연작시리즈로 방영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 글을 쓰던 때와 달리 지금은 5인 이상 모임 금지인 코로나 연말! 그래서 더더욱 이 드라마가 어울린다.)
드라마 배경은 전국 상위 0.1퍼센트가 모여 있는 자립형 사립고인 ‘수신고등학교’다. 강원도 산골에서 전원 기숙사제로 운영되어 ‘감옥고’ ‘고립고’ ‘3년 만기 알카트라즈’라 불리는 이곳은 1년 중 단 8일, 12월 24일부터 31일까지만 방학을 허락한다.
방학을 맞아 모두가 바깥세상으로 탈출한 크리스마스 이브. 여덟 명이 학교에 남는다. ‘매뉴얼맨’이라 불리는 학교 최고의 모범생 박무열(백성현), 학교 최고의 퀸카 유은성(이솜), 뛰어난 수신고 학생들 중에서도 천재로 불리는 최치훈(성준), 교내 록밴드 기타리스트이자 학교 운영위원회장 아들인 윤수(이수혁),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는 사정없이 괴롭혀 ‘조염병’이라 불리는 조영재(김영광), 청각장애로 인공 와우를 달고 다니며 항상 일상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양강모(곽정욱), 그리고 2학년 초에 전학 온 조용한 학생 이재규(홍종현). 일곱 명의 학생과 당직으로 남은 체육교사 윤종일(정석원)까지, 이들은 때마침 폭설이 내려 외부 출입이 힘든 수신고에 말 그대로 고립된다. 알고 보면 이들에겐 꿀 같은 방학에 남은 사정이 있다. 모두 방학 전에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저주의 편지를 받은 것.
계속해서 생각해봤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너는 나를 비참하게 물들였고 너는 나를 구석괴물로 만들었고 너는 네가 아는 걸 침묵했어. 너는 내 가망 없는 희망을 비웃었고 너는 내가 가진 단 하나를 빼앗아 목에 걸었고 너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가 놓아버렸고 그리고 너는 눈앞의 나를 지워버렸고 마지막으로 너는 나를 가로챘어. 8일간의 휴일이 지나고 느티나무 언덕길을 올라와 시계탑 앞에서면 죽어 있는 누군가가 보일 거야. 아기 예수가 태어난 밤에 나는 너를 저주한다.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섬뜩한 편지다. 8일간의 휴일이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편지의 발신인은 누구인지, 나는 왜 ‘그’에게 이토록 원한을 샀는지 알기 위해 여덟 명은 학교에 남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밤,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정신과 전문의 김요한(김상경)이 학교로 찾아온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저주 편지와 그로 인해 고립된 장소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우연히 찾아든 외부인이라니, 그야말로 완벽한 추리물의 장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쥐덫>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추리소설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자주 접할 수 있는 설정.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학교에 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갖가지 추리로 편지의 발신인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며 추리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 와중 편지와 관계없이 학교에 남은 문제 학생 강미르(김우빈)가 있음을 알게 되고, 추리물에서 빠질 수 없는 살인이 일어나며, 아이들이 편지의 발신인에게 저지른 죄들이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추리물로 오해하면 오산이다. 저주의 편지는 이야기의 발단이 되는 소재지만 크게 보면 거대한 맥거핀 효과(히치콕이 만든 개념.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고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장치)에 불과하거든.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그가 왜 편지를 보냈는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진짜 위협하는 건 처음부터 우연히 학교에 오게 된 연쇄살인범 김요한이니까. 8부작인 드라마는 중반까지 편지를 둘러싼 추리의 공식을 따랐다가, 김요한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아이들과 김요한 사이의 팽팽한 심리전으로 바뀐다. 정신과 전문의인 연쇄살인범과 내로라하는 수재들이지만 아직 모든 것이 불안정한 열여덟 살 고등학생들과의 심리전은 의외로 팽팽하고 가파르다. 김요한은 아이들의 트라우마와 불안정한 심리를 교묘히 건드리며 편지의 발신인을 찾는 게임을 제안하는데, 이는 사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괴물은 만들어지는 건지, 아니면 태어나는 건지’를 실험하는 것.
드라마는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수신고를 배경으로 순도 높은 악(惡)이 자라나는 새싹들을 시험하고 물들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비춘다. 설사 이야기의 팽팽한 심리전이 지루한 사람이더라도 적어도 수려한 영상미와 독특한 OST, 그리고 훌륭한 피지컬과 매력적인 마스크를 갖춘 배우들에게는 빠질 것이다. 김영광, 이수혁, 홍종현, 이솜, 성준, 김우빈 등 주연진 대부분이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모델 출신들이라 <화이트크리스마스>는 ‘모델 어벤저스’ ‘비주얼 드라마’로도 사랑받은 바 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으로 충만해야 할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지만,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믿고 의지해야 할 관계와 상황임에도 자신을 위해 남을 배신하고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죽임을 당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따스한 기류와는 도무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차가운 사실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지금 생각나는 드라마다.
크리스마스지만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지만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괴물로 각성한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에 연인이 없거나 약속이 없다 한들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혼자인 크리스마스가 싫다면 치킨과 맥주, 그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함께해 볼 것. 8~9시간 순삭을 장담한다. 모두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이 글은 2018년 12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23일인 오늘부터 수도권은 5인 이상 모임 금지,
24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 전국적으로 5인 이상 모임 금지라니, 전례없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새해를 맞게 되는 상황. 그렇다면 더더욱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