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SBS, 2005~2006)
딸 같은 며느리. 결혼을 준비하는 반도의 흔한 가정에서 한 번쯤 떠올리는 상상이다. 난 딸이 없어서 딸 있는 집이 너무 부러웠다, 그러니 우리 모녀 같은 고부지간이 되자꾸나! 이 야무지지만 허황된 상상은 이내 곧 깨지고 만다. 수십 년 함께한 딸과 어느 날 툭 나타난 며느리가 어떻게 같겠나. 하다못해 속상한 구석이 있어도 딸은 등짝 한 번 갈기고 털어낼 수 있지만, 며느리의 등짝을 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유니콘처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딸 같은 며느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 ‘막장 드라마계의 대모’로 불리는 임성한 작가다. <인어아가씨>로 막장의 신기원을 연 바 있는 임성한 작가는 2005~2006년 <하늘이시여>에서 친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이야기를 선보이며 그 누구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딸 같은 며느리, 엄마 같은 시어머니를 만들고야 만다.
한국 드라마에서 막장 요소는 필요악처럼 흔하게 등장하지만 임성한 작가와 <조강지처 클럽> <왜그래 풍상씨>의 문영남 작가,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의 김순옥 작가(현재는 <펜트하우스>라는 엄청난 작품을 쓰고 있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 3인방은 대다수 시청자가 인정할 정도로 ‘클래스’가 남다르다.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특징은 갖추되, 그들만의 세계관을 견고히 쌓아 흡인력을 높이고 시청률을 올리는 것이 세 작가의 특징. 그 중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은퇴한 임성한 작가는 차원이 다른 막장력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했었다(현재 컴백해 'Phoebe'라는 필명으로 <결혼작사 이혼작곡>을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3인방 중 임성한 작가의 두 작품은 나름의 애정을 갖고 시청했는데, 자매와 형제가 겹사돈을 맺는다는 파격 소재를 들고 나온 초기작 <보고 또 보고>와 친딸을 며느리로 맞는다는 <하늘이시여>가 그 주인공이다. <보고 또 보고>의 겹사돈이 낯설지언정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던 반면 <하늘이시여>는 의도적으로 친딸을 자신의 의붓아들과 맺어주는 비뚤어진 모성의 어머니가 등장해 어느 정도 막장력에 단련돼 있는 한국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실 <하늘이시여>의 사연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 영선(한혜숙)은 홍파(임채무)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홍파 어머니 모란실(반효정)의 반대로 헤어지고 난 후 임신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당시 양친을 급작스러운 사고로 잃은 충격으로 영선은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고, 딸을 낳아 선배 부부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딸을 낳은 사실을 기억하게 되지만 선배네는 연락이 끊겨 찾을 길이 없고, 재혼한 남편의 의붓아들을 사랑으로 키우며 딸 하나를 낳은 채 현재에 이른다.
<하늘이시여>는 남편과 사별한 영선이 흥신소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낳은 딸 자경(윤정희)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딸을 찾았다면 당장 눈 앞에 나타나 “내가 네 엄마다!”를 외치며 얼싸안고 울며불며 해후하는 게 마땅하건만, 이 엄마는 남다르다. 딸을 찾아 엄마로서 정을 주는 것보다 한층 더 안정된 삶, 그러니까 잘나가는 뉴스 앵커이자 성품 바른 의붓아들 구왕모(이태곤)와 결혼시켜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짠 것이다. 설상가상, 딸 자경은 양부모인 선배 부부가 일찍 죽어 악독한 계모 배득(박해미) 슬하에서 스펀지처럼 쥐어 짜이며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고 있기에 더욱 영선의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던 것. 어이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떤 심정인지는 알 것 같은 묘한 기분. <하늘이시여>는 이 묘한 기분을 작가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과 필력으로 납득시키고자 한다.
차마 이해되지 않는 이 막장 요소를 욕하면서라도 보게 만드는 것은 배우진의 연기가 한몫한다. 85부작 내내 걸핏하면 두 손을 애처롭게 모으고 처연한 표정으로 “하늘이시여”를 부르짖으며 잃었던 딸에게 행복을 주고자 결사적인 영선으로 분한 한혜숙의 연기력은 칭찬해 마땅하다. 말도 안 되는 이 설정에 몰입할 수 있던 것은 한혜숙의 연기에 큰 공이 있다고 봐야 한다. 신인들을 대거 주연으로 기용하는 임성한 작가의 특성상 젊은 주연들은 모두 당시 신인이었는데, 자경을 연기한 윤정희는 (부정확한 발음이 매우 안타깝기는 하지만) 아름답고도 처연한 분위기로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으며 ‘눈물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구왕모를 맡은 이태곤 역시 윤정희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으로 데뷔해 지금껏 연기인생을 이어오고 있고, 왕모를 흠모하고 자경을 괴롭히던 예리 역의 왕빛나, 왕모의 동생이던 구슬아 역의 이수경도 <하늘이시여>로 빛을 본 사례다. 특히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수경이 오열하며 내지르는 신은 이 드라마의 막장 요소를 한 신으로 압축 설명하는 압권 중 한 장면이다.
“새언니가 아니고 그럼 언니였어? 그러면 오빠가 형부? 엄마한텐 사위야 아들이야? 내가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 애가 외삼촌이라고 부를까, 이모부라고 부를까? 인큐베이터에 있는 왕자가 나한테 이모라고 불러야 돼, 고모라고 불러야 돼?!”
과하고 어이없는 작중 인물들의 상상력과 행동들(특히 자경의 계모 배득은 필히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수준)이 혈압을 오르게 하고, ‘시속 70의 차량에서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여자 가슴을 만지는 느낌’ 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해괴한 TMI(Too Much Information)들이 실소를 자아내며, 심지어 ‘웃찾사 보면서 웃다가 돌연사하는’ 말도 안 되는 설정들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하늘이시여>. 그래도 장담한다. 한 번 보면 그 모든 쉽지 않은 조건을 이기며 보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이 글은 2018년 10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결혼작사 이혼작곡>으로 돌아온 '피비' 임성한 작가는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하늘이시여> <아현동마님> <보석비빔밥> <신기생뎐> <오로라공주><압구정백야> 등 쉽게 넘볼 수 없는 막장 드라마로 드라마계에 한 획을 그었죠. 지금은 <펜트하우스>의 김순옥 작가가 한 차원 다른 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임성한은 임성한. <결혼작사 이혼작곡>도 어떤 차원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인어아가씨>도 훌륭했지만 <하늘이시여>의 한혜숙 님 연기가 더 절절하여 임성한 작가의 마스터피스로 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