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쟁이다. 그래서 방송작가도 하고, 글 쓰는 공무원도 하고, 스토리텔링 강의도 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이 묻는다.
“요새 방송 안 해요?”
“요즘 글 안 쓰고 뭐 해요?”
“이제는 글 안 써요?”
내가 눈에 보이고, 방송한다고 돌아다니고, 강의하고 책을 쓴다고 알려야 내가 글쟁이고 그러지 않으면 글쟁이가 아닐까? 내가 겉모습이 방송작가일 때도, 공무원일 때도,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도 나는 글쟁이였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글쟁이가 아닌 적 없다.
여러 사정으로 글을 쓰던 일을 다 내려놓고, 푸르덴셜 생명보험 회사에서 Sales Manager를 했다. 글을 쓰지도 않으니 두 아들 먹여는 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가장 어려운 일이 영업이라고 하는데 그 일을 한 거다. 그리고 Sales Manager는 사람을 채용하고 교육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런 일들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글을 쓸 여유라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번씩 부탁이 들어오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에 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분에게 소개를 받았다며 취업 컨설팅을 부탁받았다. (정말 별의별 것을 다 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귀찮기도 했지만,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나를 찾을까 하는 마음에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만난 27살의 한 청년, 첨엔 대학도 나오지 않고 막노동 같은 일을 하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친 이후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2년제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회사’에 취업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든든한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이 너무 마음에 남아서 이 친구를 도와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나의 이력서를 공개하고 따라오겠느냐 묻고 시작된 것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전에 먼저 본인에 대해 알아야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나의 옛날 모습은 어떠했는지,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고, 언제 가장 슬펐는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런 질문으로 이 청년은 3시간가량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렇게 유심히 들어봐 준 것도 처음이고, 내 눈빛에서 진심이 보여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나와의 대화가 포근한 침대나 푹신한 쇼파에 누워있는 기분 같다고 했다. 그 표현도 너무 고마워서 한 달 가까이 무료로 이 친구 컨설팅을 해줬다. 이력이고 자격조건이라고는 없어서 삶으로 이야기를 녹여내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밥이 나오기도 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 친구의 어머니였다. 내가 작가라고 해서 믿고 일주일에 1~2번을 보냈는데, 우리 애가 작가님 좋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구나 했는데 그런 일 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작가님인 줄 알았더니 사기꾼도 아니고 마음 같아서는 가서 다 뒤집고 아주 망신을 주고 싶지만 참는다고 했다. 30분은 엄청 욕을 먹었던 것 같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 말하고 시작했던 일인데 갑자기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이러는지도 몰랐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내가 ‘작가님’이었다가 왜 작가님이 아닌 사기꾼이 된 걸까? 글만 쓰고 있지 않아서? 처음부터 나는 나의 상태와 존재를 공개하고 시작했던 건데 왜 사기꾼이 되었을까? 이날 온종일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그 친구는 본인 엄마한테 사정을 들었는지 전화가 왔다. 하지만 나는 받을 힘이 없었다. 죄송하다면서 문자메시지도 들어왔다. 대답도 못 했다. 아니, 하기 싫었다. 그리고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짜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 어머니께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 어머님,
어머님께 비하진 못하지만, 저도 나름 어려운 일 겪으며 살아온지라
젊은 친구들 고생하는 것 보면 하나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글 쓰는 일 놓지 않고
자소서도 돕고, 면접도 돕고 있습니다. 단순히 돈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어머님, 저는 지금 제 일을 좋아합니다.
보험은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고, 가정을 돕는 일입니다.
제가 서른 초반에 암에 걸렸을 때 우리 집이 무너지지 않게 도와준 게 보험이고,
제가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살 수 있게 도와준 게 보험입니다.
전 제 자식도 푸르덴셜에 들어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일은 존중받고 존경받을 일이고,
보험 일은 그렇게 지탄 받을 일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같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몆 글자 끄적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쓴 소리 들어가며 하는 보험 일이 누군가의 가정을 지켜내는
더없이 소중한 일이고 고귀한 일이라
누구나 할 수 없고,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한다는 것은요.
○○ 씨는 평범하게, 돈 걱정 없이 잘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든든한 아빠가 되는 것이, 그런 가정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 어머님, 평범한 것은 꼭 공장을 다니는 것인가요…?
돈 걱정 없는 것이 얼마를 버는 일이며,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아드님께 다양한 길을 알려드렸고,
심지어 저희 아버지 사업체까지 연결해줄 수도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자소서는 아는 분이 많다고 하시니
다시 맡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씨와 8시간 정도 상담했습니다만 시간상으로 제가 투자한 건
봉사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앞으로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바랍니다.’
한 번 글쟁이는 고기 굽는 일을 해도 글쟁이고, 청소해도 글쟁이고, 무엇을 하든 글쟁이다. 자신의 삶 속에 녹아있는 그것들을 어찌 아니라 한단 말인가. 지금 보이는 모습이 조금 다른 모양이라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 번 글쟁이는 영원한 글쟁이다. 다른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면 그 분야로는 더욱 전문적인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글이 사람의 귀천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결국, 장문의 메시지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 씨 어머니가 아닌 ○○ 씨에게 보냈다.
다음 수업은 더는 없다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