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석윤 Apr 27. 2018

절차탁마의 시간

<사서오경>의 하나인 <역경>(주역)은 세상의 모습과 원리를 동양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주역의 64괘 중에는 산천대축(山天大畜)이라는 괘가 있다. 산천대축은 山이 天 위에 있는 괘로, 산이 하늘 위로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이다. 주역에서 山은 굳게 지키고 막는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천대축은 무언가가 흐름을 크게 막고 있는 형세다. 산천대축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막힌 시간은 쌓는 시간이다


畜(축)은 "막다/막는다"란 의미 "쌓다/쌓는다"란 의미를 함께 가진다. 이는 통하지 않고 막혀 있어야만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물은 막혀있을 때 비로소 쌓인다. 흐름을 막아 물을 모으는 을 생각하면 된다. 사람도 자연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성장하는 시기는 막혀있는 시기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아니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흐름이 좋아 잘 나아가는 시기에는 본인의 문제와 부족함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마련이다. 인식되지 않는 문제는 자연히 방치될 수밖에 없다. 반면 흐름이 막혔을 때 사람은 일이 풀리지 않는 원인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한계와 문제점, 부족함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며, 이를 체감하고 깨닫게 된다.  막힌 시간은 잘 나아갈 때는 보이지 않던 스스로의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며, 능력과 인격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셈이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양과 흐름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쏟을 수 있는 때도 막혀있는 때다. 손정의가 그의 투자와 경영 철학의 근간이 되는 제곱병법을 고안한 때는 20대 후반 몇 년에 걸쳤던 투병기간이었다. 그는 이때 병상에서 약 4,000권의 책을 읽었으며, 손자병법에서 영감을 받아 제곱병법을 완성하게 된다. 정약용 18년 간의 유배 기간동안 <목민심서> 등 그의 대부분의 명저를 저술. 그는 18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다. 존 스컬리에 의해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더욱 크게 재기할 수 있었던 데도 픽사에서의 시간이 있었다. 


2. 큰 축적큰 변화를 만든다


크게 가로막는 형상의 산천대축을 주역에서는 오히려 변화가 하늘을 찌르는 시기로 본다. 크게 막힌 상황에서 큰 축적이 일어나며, 큰 변화는 큰 축적이 있을 때야 비로소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막론하고 많은 큰 변화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인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축적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의 근육도 근육의 성질이 변하기까지 충분한 자극이 누적되고서야 변화가 시작된다. 오랜 기간의 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사람의 몸에서는 질병이 발생한다. 사람 간의 사소한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 쌓이면 관계는 결국 크게 틀어진다. 2008년 금융위기는 서브프라임 부실채권의 큰 축적이 불러온 결과였다.


자연현상에서도 이는 비슷하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까지 모든 산불을 진압하는 것을 산불 대응 정책으로 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사람의 힘으로 끄는 것이 불가능한 대형 산불 사태들을 초래했다. 자연 산불로 인해 없어졌어야 할 수많은 죽은 나무들이 오랜 시간 생태에 크게 축적되며 오히려 대형 산불을 발생시키는 연료가 된 것이다.


3.  순경(順境)을 경계한다


<주역>에서 산천대축을 설명하는 첫 구절은 "위태로움이 있으니 그침이 이롭다(有厲 利已)" 이며, 이어지는 구절은 "수레의 바퀴를 벗겨 스스로 멈추라(輿說輹)"다. 다음 구절은 복잡하지만 쉽게 말하면 "그치는 지혜를 발휘한 후에는 좋은 말을 타고 날아가는 것과 같을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良馬逐 利艱貞 日閑輿衛 利有攸往)


주역에서는 크게 쌓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위태롭다고 말한다. 계속되는 순경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쌓을 시간을 주지 않으니 경계해야 한다. 주역에서 스스로라도 쌓기 위해 그쳐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만물은 나아가는 때가 있고 그치는 때가 있다. 나아가는 시간만큼 그침의 시간이 있으니, 그침의 지혜가 중요하다. 그친 후 때를 기다리며 배우고 익혀 자신을 갈고 닦으면 좋은 말을 타고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주역은 말한다.


4. 요약


1) 막힌 시기에는 크게 쌓는다. 막힌 상황에 처했을 때 쌓아야 하는 시기임을 깨닫지 못하면 쌓지 못한다. 전력투구하여 충분히 쌓지 못하면 변하지 못하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를 살리지 못한다.


2) 큰 축적이 큰 변화를 만드는 것을 인지하고 이해한다.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큰 변화가 쉽게 나타나지 않음에 초조해하지 않으며, 해로운 변화는 크게 쌓이는 것을 기민하게 살피고 경계한다.


3) 나아가야 하는 때와 그쳐야 하는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쳐야 하는 때에 나아가고 있다면 스스로 경계한다. 공부와 인격을 충분히 쌓지 못한 채 나아가는 것오히려 위태로운 길일 수 있다. 그쳐서 충분히 쌓는 시간은 잃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다. 도약과 비상을 위한 발판이 된다.


커다란 장애물과도 같은 산천대축의 형세는 언뜻보면 난관의 시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형상에 불과할 뿐이다. 하늘 위까지 높게 솟아 흐름을 막는 거대한 산은 자신의 난제를 해결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만하는 시간이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크게 막힌 때가 아니면 크게 쌓을 수 없다. 요컨대 산천대축은 절차탁마의 자세를 요하는 시기다.




* 산(山)의 정확한  이름은 간(艮:그칠 간)이고 산(山)이라 읽는다. (산은 소괘의 하나고, 산천대축은 대괘의 하나다.)

* 위에서 말한 주역의 구절은 사괘를 구성하는 각 효(음과 양)에 대한 해석이다. 설명을 편하게 하기 위해 구절로 말했다.

* 주역에서 건(乾)괘인 天은 에너지, 에너지의 근원, 에너지의 흐름을 의미한다. 산천대축은 천 위에 산이 있는 형세이므로 에너지(天)의 흐름을 산(山)이 막고 있는 형국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해석의 방법이 다를 뿐 뜻은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