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탄산음료, CD 음반. 이 세 가지 제품의 공통점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제품이라는 점이다. 손편지를 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 됐다. 탄산음료는 다이어트와 피트니스로 대표되는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로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러나 제품의 성장 전략 측면에서 본다면 위 관점은 한계가 있다. 제품의 소비 맥락을 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제품의 소비 맥락을 정적으로 보게 되면 제품의 성장 전략도 기존 소비 맥락의 틀 안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제품의 소비 맥락은 동적이다. 끊임없이 변한다.
GUCCI가 얼마 전 $490(약 50만 원)에 출시한 수영복(아래 그림)은 "수영할 때 입지 않기를 권장한다(To get best from this item, we advise that you do not wear it to swim)"는 놀라운 제품 설명과 함께 판매됐다. 해외에서는 많은 이들이 트위터나 블로그, 기사를 통해 이를 조소했지만 이 수영복은 현재 모든 사이즈가 완판 된 상태다. GUCCI는 왜 수영할 때 입을 수 없는 수영복을 내놓았을까? 이는 첫째로 수영복의 소비 맥락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GUCCI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수영복의 소비 맥락을 확장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영복 소비 맥락의 변화를 살펴보자.
소비 맥락을 살피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보면 좋다. 1.타겟 사용자 2.시간적 소비 맥락 3.공간적 소비 맥락이다. GUCCI 수영복의 타겟 유저인 젊은 여성이(1), 휴가에(2), 리조트에서(3) GUCCI 수영복을 입을 때 물에 대한 내구성이 중요할까,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사진을 예쁘게 남기는 것이 중요할까. SNS의 보편화로 수영복의 소비 맥락은 스타일적 요소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실용적 가치를 다소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각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수영복을 구매하고 싶은 소비자들이 충분히 많아진 것이다.
둘째로 GUCCI가 주도하는 수영복 소비 맥락의 확장전략을 살펴보자. GUCCI는 애초에 이 수영복을 수영복 카테고리를 넘어 일반 패션의류로 출시했다. GUCCI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 수영복(Sparkling swimsuit with Gucci Logo)은 실제로 Tops & Shirts의 카테고리에 있다. 그리고 제품 정보 하단의 <How to style it>에서는 이 수영복을 활용한 코디법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인스타그램, 구글 등에서 GUCCI 수영복을 검색해보면 실제로 많은 셀럽들과 일반인들이 GUCCI의 의도처럼 GUCCI의 수영복을 트레이닝팬츠, 청바지 등과 같은 일반 의류와 코디해서 입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
패션 업계의 전문가들도 이 흐름에 동참한다. 미국의 저명한 스타일 리스트 Lauren Messiah는 그녀의 사이트에서 "How to wear a swimsuit as a bodysuit"란 제목으로 GUCCI 수영복을 어떻게 stylish하게 입을 수 있는지에 대한 팁을 썼다. (아래 사진은 그녀의 아티클에 실린 사진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티클 첫 문장은 GUCCI가 만들어낸 수영복의 새로운 소비 맥락을 가장 잘 표현히고 있다.
What do you do when you find a swimsuit that is so stylish, but you know you aren't hitting the beach afternoon? You wear it as a bodysuit instead.
Stylish한 수영복을 꼭 비치에서만 입어야 할까?란 그녀의 말은 GUCCI가 제시하는 수영복의 새로운 소비 맥락이 공감대를 얻는 포인트가 된다.
이와 같이 GUCCI는 수영복의 소비 맥락을 "트렌드를 앞서 나가는 패션 의류"로 과감히 확장했다. 위 사례들은 이 전략이 거둔 마케팅적 효과와 소비 맥락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GUCCI의 전략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일까. 이는 "포기함으로써 취하는" 발상의 기발함에 있다. 많은 기업은 제품을 혁신할 때 제품의 본연적 기능인 1차적 기능(예시: 휴대폰의 전화 기능) 위에 2차적 기능(예시: 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는 불문율처럼 늘 당연하게 생각돼 왔다. 그러나 GUCCI는 모두가 당연하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품의 1차적 기능(물에 대한 내구성)을 포기하는 발상을 했다. 새롭게 나타난, 그리고 새롭게 주도할 소비 맥락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1차적 기능성을 파괴하는 2차적 기능성(시각적 아름다움의 극대화 & 패션 의류로서의 기능성)을 과감히 선택한 것이다. GUCCI는 수영복을 수영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포기함으로써 수영복을 태생적 굴레에서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모두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비 맥락의 장을 열었다.
이는 GUCCI라서 가능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 탁월함이 있다. GUCCI에게 좋은 전략은 GUCCI만이 할 수 있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애플에게 좋은 전략은 애플만이 할 수 있는 전략이며, 삼성에게 좋은 전략은 삼성만이 할 수 있는 전략이다. 경쟁자가 쉽게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영복 소비 맥락의 확장은 GUCCI의 가장 큰 경쟁우위인 브랜드 자산을 레버리지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고유의 브랜드 자산을 이용한 전략은 타 브랜드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해자가 있는' 전략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브랜드 자산의 활용 전략은 성공할 경우 브랜드 자산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해자를 활용해서 더 큰 해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참고) 새로운 소비 맥락을 탄생시킨 기타 사례
1. 아이폰
과거 피처폰 시절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소비 맥락의 흐름을 읽는데 주력했다.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으니 화소 경쟁을 했다. 작은 화면에 불편함을 느끼니 화면을 좀더 크게 만들거나 화면을 가로로 돌리는 기능을 제공했다. 모두가 소비자의 행동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2007년 1월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기존 휴대폰의 소비 맥락에 새롭게 두 가지 소비 맥락을 추가한다. 음악(아이팟)과 인터넷 pc다. 이는 당시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재탄생한 순간이다.
2. 엽서
GUCCI나 애플과 같은 대단한 기업들만 새로운 소비 맥락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일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연희동에서 발견한 엽서의 사례를 소개한다.
엽서의 기존 소비 맥락은 크게 두 가지였다. 편지와 여행지에서의 기념품이다. 하지만 연희동 한 책방에서 발견한 엽서는 다른 소비 맥락을 갖고 있다. 이 엽서의 뒷면 흰 공간 구석에는 짧은 메세지와 메일 주소가 남겨져 있다.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는 메세지다. 늦더라도 꼭 회신은 한다고 한다. 이 엽서의 소비자는 편지를 쓰거나 여행 장소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엽서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를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이다. "위안과 위로"의 소비 맥락은 기존 엽서 시장에서는 캐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소비 맥락이다.
+ 연희동에서 찾은 한 가지 사례를 더 소개한다. 연희동에는 <책 바>라는 바(bar)가 있다. 통상 바의 소비맥락은 혼자서, 혹은 소수가 조용히 술을 마시는데 있다. 하지만 <책 바>는 이와 달리 "심야 서점"의 맥락, "혼자 조용히 책 읽는 공간"의 맥락으로 바의 소비 맥락을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이곳에서는 유명 소설에 나오는 술을 마시며 심야 시간까지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다.
3. 코카콜라
코카콜라의 과거 소비 맥락은 탄산음료 소비의 맥락이었다.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을 때 코카콜라를 마셨다. 하지만 코카콜라에 메세지가 등장하고부터 "메세지의 전달"이라는 새로운 소비 맥락이 탄생했다. 코카콜라 전면에는 "오늘도 힘내"와 같은 메세지가 등장한다. 코카콜라는 누군가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주고 싶을 때, 스스로를 위로할 때 등 메세지 전달의 맥락으로 소비 맥락을 새롭게 확장했다(아래 사진). 탄산음료를 마셔야 하는 맥락만으로 소비 맥락을 제한한다면, 피트니스와 다이어트 열풍이 부는 시대에 코카콜라의 판매량은 절망적일 것이다.
4. CD 음반
과거에는 CD 음반으로 노래를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 온라인 음원 서비스를 이용한다. 판매량이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원 사업자에게 CD 음반 수익은 판매단가가 높은 포기할 수 없는 수익원이다. 이를 위해 음원 사업자들은 새로운 소비 맥락을 고안한다. CD 음반에 팬 사인회 추첨권, 한정판 멤버 포토 카드 등을 구성품으로 넣는 것이다. 희소성 있는 굿즈의 구입 경로,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구매로 CD 음반의 소비 맥락을 바꾼 셈이다. 이를 얻기 위해 일부 팬들은 몇 십장씩 CD를 구매하기도 한다. 요즘에도 CD 음반이 수십만 장씩 팔리는 이유다.
<주역>의 총론격 해설서인 <계사전>에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란 구절이 있다.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의미다. 기업의 생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존 소비 맥락이 쇠하거나 성장이 정체되었을 때, 직접 변화의 동인(動因)이 되어 소비 맥락의 변화를 꾀하는 일도 필요하다. 새로운 소비 맥락의 개척은 곧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 된다.
<관련 정보>
* 위 수영복에 대한 설명은
https://www.net-a-porter.com/us/en/product/993666/gucci/printed-swimsuit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공식 홈페이지 제품 설명란의 "Due to the nature of this particular fabric, this swimsuit should not come into contact with chlorine." 란 문구 때문이다. 보통 수영장의 물에는 염소 성분이 있다 염소로 소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수영복은 염소와 접촉하면 안 된다는 설명이다.
* 아래 링크는 미국의 저명한 스타일리스트 Lauren Messiah 의 사이트다. 그녀는 GUCCI의 수영복을 소재로 수영복을 일반 의류처럼 패션 아이템으로 입을 수 있는 팁을 적었다.
https://laurenmessiah.com/2018/03/how-to-wear-a-swimsuit-as-a-bodysuit/
* 아이폰을 개발중이던 2005년 애플은 태블릿 PC도 개발중이었다. 그리고 아이폰은 태블릿 PC에서부터 영감을 받았다. 아이폰에 PC의 소비 맥락이 들어간 이유다. 음악의 경우, 스티브 잡스는 경쟁사들이 나중에 MP3를 스마트폰과 결합할 것을 우려하여 애초부터 음악 소비의 맥락을 아이폰에 합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초기에 아이팟을 아이폰으로 바꾸는 개발을 시도했었다. (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 3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