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이틀 째,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깰까 핸드폰 액정으로 불을 밝혀가며 캐리 어를 뒤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지금 사서 고생이지?'
스페인에 가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여행 경비를 모았다. 수업이 끝나고 열심히 샷을 내렸고 주말에는 마트에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과일 시식을 권했다. 키위를 팔 땐 초록색 두건, 바나나를 팔 땐 노란색 앞치마를 하고 하루 종일 과일을 팔고 나면 돌아가는 길은 캄캄한 밤이었다. 그 시간에는 곧 낯선 땅에 서있을 나를 생각했다. 그럼 뭔가 하루 종일 잠자고 있던 새로운 호르몬이 온몸을 도는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기다렸던 여행이었는데, 지금은 3평 남짓한 혼성 도미토리에서 불도 못 켜고 잠버릇이 좋지 않은 룸메이트의 코골이를 들으며 폼 클렌저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 자꾸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리해서 한 달 반의 스페인을 계획한 이유. 다들 취업 안 하고 어디가냐며 누구 하나 걱정하지 않는 이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알바해서 그 도시의 가장 싼 숙소에서 매일 밤을 보내는 이 6주간의 생활을 구태여 시작한 이유.
그리고 두 달 전의 광화문을 떠올렸다.
친구와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 시간도 때울 겸 교보문고를 서성이던 중에, 한동안 가지 않았던 여행 코너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그쪽이 눈에 띄게 북적이고 있었다. 색색깔의 여행 책을 하나씩 들고, 다들 진지하게 뭔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대학생인 것처럼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애들도 보였고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것 같은 회사원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뉴욕 가이드 북을 읽고 계신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는 책을 읽는 내내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러고 보면, 서점에서 여행 코너만큼 반짝이는 곳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쪽의 공기에는 여행을 가까이든 멀게든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설렘이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책은 안 보고 그 날따라, 그 사람들만 보였다.
그 서점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여행에 대한 판타지 하나 없는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언제나 안락함을 추구하며 집과 자기 방 침대를 최고의 휴양지로 치는 내 친구 Y도 "그 뭐야, TV에서 캐나다 무슨 국립공원이 나오는데 거긴 한 번 가보고 싶기도 하더라."라고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했었다. 몇 월 며칠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초저녁쯤 도착해 유명하다는 펍에서 피시 앤 칩스로 저녁을 먹고 빅벤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유랑에서 미리 동행을 구해놓는 세세한 계획이라든가 당장 모든 걸 때려치우고 내일 어딘가로 떠나겠다는 거창한 결단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꽃보다 누나 재방송을 보고 지나가는 말로 "와, 나도 지중해에서 수영 한 번 해보고 싶네."라고 중얼거린다든가 잡지에서 우연히 본 북유럽의 오로라 사진에 가슴이 살짝 뛴다든가 하는 설렘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 기회가 된다면 가서 해보고 싶은 것들 말이다. 소소하지만 가슴 뛰는 사람들의 판타지를 그 날 그 서점에서 봤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언제나 가지고 있는 여행 계획이지만 우습게도 진짜로 갈 계획은 없었던 그 여행을 계획했다. 졸업도 해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지만 그래서 가장 좋아했던 서점의 여행 코너도 한동안은 그냥 스쳐만 지나갔고 자주 가던 여행 블로그도 발길을 끊었었지만, 다시 내가 사치라고 단정 지었던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생이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약 두 달이 지난 후, 나는 가장 일반적인 예산의 절반 정도 되는 돈을 벌어 스페인의 수도로 날아왔다.
나는 내가 원할 때 여행할 수 있는 현실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여행하는 길 위에서 문득문득, 고르고 고른 여행책을 진지하게 읽어 내려가던 사람들 주위를 흐르던 반짝이는 공기가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글을 쓴다. 당장 다른 중요한 것들을 멋지게 내려놓고 여행을 떠날 수는 없지만, 직장을 그만둘 생각도 없고 낯선 곳에서 자아를 나도 한번 찾아보고 싶긴 한데 당장 항공권을 결제할 여유 혹은 용기가 부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언제나 낯선 곳의 설레는 풍경 두어 개쯤을 안고 사는 평범하지만 꿈꾸는 여행자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나도 그렇게 반짝이며 살고싶은 마음에 쓴다. 그리고 매일 이 지구 어딘가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꿈꾸며 혼자만의 판타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길지 않은 시간 내에 그곳에 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출발 전의 설렘까지도 온전히 그들 여정의 일부이므로.
세수를 하고 들어와 또다시 몰래 끙끙 수건을 꺼내다가, 코골이 룸메이트가 침대 난간에 걸어 놓은 I LOVE MADRID가 새겨진 티셔츠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난다. 미시간에서 왔다던 이 친구는 내일 아침 일찍 늘 가보고 싶었던 톨레도에 간다더니 그래서 초저녁부터 이렇게 잠을 청했나 보다.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었을까. 귀마개를 귀에 꽂고 누워 눈을 감는다. 금방 또 내일로 설레기 시작한다.
If you have your own solitary fantasy for anywhere in this planet and keep on dreaming of it, your travel has already beg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