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 글을 쓸까”
글을 쓰다 보니 내가 글을 쓰는 의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의미는 없었다.
내가 아니라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쓴다. 그것도 나보다 더 잘 쓴다. 훨씬더 깊은 전문지식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이 글에 가득 담겼다.
그에 비하면 내 글에는 고통에서 비롯되는 통찰력도, 전문지식도 없다. 누군가 한 말을 갖다 붙이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연결짓는 게 전부다.
‘잘 짜깁기 한 무언가’. 내가 내 글을 정의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 모든 지식이 짜깁기에서 나온다. 스스로에게 비롯되는 전문지식이란 없다. 살고 지식을 먹고 다시 삶으로써 소화시키고 지식으로 뱉어내는 게 지식의 본질이니까.
잘못된 게 아니라 할지라도 면피할 수는 없다. 결국 내 글은 내 삶이 묻어날 만큼 성숙하지 않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언제 글을 쓰는지” 물었다.
난 언제 글을 쓰나. 난 언제 글을 쓰고 싶나.
좋은 것을 봤을 때, 온 몸이 사랑으로 끓어오를 때, 분노로 타오를 때, 그리고 고독으로 쓰라릴 때.
사랑으로 몸이 끓어오르면 난 이 순간을 박제하고 싶어졌다. 언젠가 다시 아프고 분노하고 고독할 때 내가 내 글 속에 들어가 위안을 찾고 싶었다.
내 글이 내 안식처가 되어주길 바랐다. 내 피안도가 되어주길 바랐다. 내 낙원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래서 글을 썼지만 글은 안식처도, 피안도도, 낙원도 되어주지 못했다. 글은 내가 찾지 않는 이상 한 군데에서 가만히 없는 듯이 있다. 항상 숨죽여 존재한다.
내가 타오르는 슬픔으로 고통받을 때 사랑을 박제한 글은 먼저 나를 찾아와주지 않는다.
때때로 그런 글은 날 더 아프게 했다. 그때는 행복했는데 지금은 왜 이러지, 그때는 외롭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외롭지.
정체돼 있고 머물러 있는 사랑의 순간은 점점더 빛이 났고 점점더 멀어졌다.
그러나 분노로 타오를 때, 고독으로 쓰라릴 때 쓰는 글은 내게 위안을 줬다.
그럴 때 글을 쓰면 텅 빈 듯한 공허감을 줬다. 공허감은 분노나 고독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아프지는 않았다. 가끔 너무 지나쳐 외로울지언정.
최승자 시인은 시집의 서문에서 말했다.
“한바탕 넋두리를 한 기분이다”라고.
결국 글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닐까. 의미고 이유고 다 떠나서 그저 넋두리.
내가 여기에 있었노라는 낙서같은 것, 혹은 그저 감정의 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