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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빛초록
Jan 13. 2022
님아 그 집을 떠나지 마오
도망친 햄스터 잡기 프로젝트
90년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햄스터키우기가 하나의 유행이었다.
동글동글한 몸에 보송보송한 털이 숑숑 나있는 햄스터는 분명히 '쥐'과였음에도 주머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귀여움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교길 학교 정문 앞에서 팔던 자주색, 초록색, 보라색, 분홍색으로 염색한 수컷 병아리는 단 돈 500원이면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지만
햄스터는 마트에서 한마리에 3-4천원이나 했으므로 몇달간 간식을 포기하고 저금을 해야 만날 수 있는 동물이었다.
병아리는 집에 남아도는 박스를 가져다가 부드러운 천을 깔아주고, 조 같은 곡물먹이만 줘도 키울 수 있었지만
나름 비싼 동물이던 햄스터는 5천원~1만원 하는 작은 이동식 투명 케이지부터 3~4만원 하는 철제 케이지까지 집도 고급이었다.
한달 용돈 2~3천원이던 시절이니 부모님께 조르지 않으면 데리고 올 수 없는 동물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이 그 시절 애완 햄스터 한마리쯤은 키우고 있었다.
나도 유행에 뒤쳐질 수 없었기에 '나만 없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뻔한 핑게를 대며 부모님을 졸라 예쁜 햄스터 두마리를 암컷, 수컷 각 1마리씩 입양하기로 했다.
입양을 앞두고선 하루 온종일 햄스터 생각 뿐이었다.
어떤 종류의 햄스터를 데리고 올지가 가장 고민이었다.
정글리안 햄스터는 2천원 정도로 가장 저렴하지만, 배부른 줄도 모르고 먹이를 볼이 미어지게 한가득 먹고 무섭게 살이 올라서 비만 쥐 같아지는게 영 마음에들지 않았다.
온 몸이 하얀색이던 햄스터는 마치 눈송이 같고 보드라운 솜털 같아서 그 아름다움이 좋았지만 왜인지 너무 연약해 보여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배는 하얗고, 등은 연한 은갈색을 띄던 사슴 햄스터는 입양하기로 했다. 하얗고 갈색인 몸에 새까만 눈동자까지, 내겐 완벽한 햄스터였다.
2주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삐약이 이후로 처음 키워보는 동물이었기에 사랑을 가득 담아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또 우리집에 좋은 것들을 가득 가져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름도 '행복이', '사랑이'라고 붙여주었다.
그래서 알록달록한 쳇바퀴에 쿨쿨 잠이 올 것만 같은 햄스터 나무 집까지 들어있는 3만원짜리 철제 케이지도 함께 샀다.]
그날도 엄마는 "에이구, 이 돈덩어리."라고 머리를 꽁 박으며 한마디 핀잔을 주었지만 햄스터를 만난 설렘에 기분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케이지 안에는 햄스터가 돌아다닐 때 다치지 않도록 얇은 톱밥을 두껍게 정성으로 한가득 깔아주었다.
햄스터 사료도 아침 저녁으로 예쁜 그릇에 담아 넣어주고, 특식으로 해바라기씨도 꼬박꼬박 넣어주었다.
해바라기씨를 줄 때면 그 조그마한 손으로 해바라기씨를 꼬옥 붙잡고선 코를 올록볼록 움찔하며 야무지게 씨앗 껍질을 360도로 벗겨내곤
말그대로 '옴뇸뇸'하면서 함냐함냐 먹는 모습이 그렇게도 귀엽고 예뻤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케이지 앞에서 햄스터에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재밌고 속상한 일들을 떠들곤 햇다.
내가 슬픈 날엔 햄스터도 천천히 케이지 안을 누볐고, 내가 신나는 날엔 쳇바퀴를 신나게 돌리며 내 말을 들어주어 내 마음을 아는 듯해 감동스러웠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학교는 햄스터 괴담으로 떠들썩했다.
햄스터가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놓고는 3일만에 와앙 잡아먹는다는 괴담이었다.
아기 햄스터들이 눈 뜨기만을 기다렸는데, 어느날 아침에 보니 햄스터 케이지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선 당장 햄스터 두마리를 서로 분리시켰다. 잡아먹을 일이 애초에 생기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안심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언제나와 같이 행복이, 사랑이를 불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에 숨어서 자나 싶어서 나무집을 휘까닥 뒤집었는데 그 안에도 없었고,
톱밥 안에 숨었나 싶어서 손으로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지만 어느곳에도 없었다.
그제야 사색이 되어서는 케이지 어딘가 뚫렸는지, 문이 열려있진 않았는지 꼼꼼하게 찾아보았는데 어디도 빠져나올만한 틈은 없었다.
하루종일 사라진 행복이와 사랑이을 부르며 울고 있으니 엄마는 햄스터 유인 프로젝트를 하자고 했다.
방법은 사랑이와 행복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 씨를 집안 곳곳에 뿌려 놓는것 !
해바라기씨 근처에는 햄스터가 나타났을 때 덮을 수 있는 바가지를 놓았다.
그리곤 제발 나타나서 해바라기씨를 먹기만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간은 도대체 언제 나와서 귀신같이 까먹었는지, 해바라기씨 껍질의 흔적만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집 안 어딘가에는 있구나! 싶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바라기씨를 더 많이 뿌렸다.
5일정도 되었을까,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거실 한가운데 사랑이가 나타나서 겁도 없이 해바라기씨를 뇸뇸 까먹고 있었다.
혹시 눈치채서 도망가지나 않을까, 바가지를 든 손에 땀이 가득하도록 긴장해서는 바닥을 기어 다가가서 "탁!"하고 바가지를 덮었다.
큰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어두워진 주위에 혼비백산 한 사랑이가 바가지 안에서 벽을 치며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조심스레 바가지를 들어 얼른 손으로 잡아 다시 케이지 안에 넣었다.
그로부터 3일 뒤에는 행복이도 똑같은 방식으로 베란다에서 잡았다.
당췌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몸집에 비해 대궐같은 집도 있고,
깨끗한 톱밥과 프라이빗한 나무집에 심심할 새 없는 장난감들, 배부르게 제공되는 먹이를 박차고서 왜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문을 열고 도망을 갔나 싶어서 이번에는 케이지 문을 테이프로 꼼꼼히 막았다.
이젠 도망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할 찰나,
일주일 뒤 또 다시 두마리는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또같은 방법으로 다시 잡을 요량으로 해바라기씨를 집안 곳곳에 뿌려두었지만 저번만큼 간절하진 않았다.
또 다시 도망치다니 얼마나 괘씸했는지, 그렇게 잘해줬는데 고마운줄도 모르고 떠난 햄스터라니 잡을 가치가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몇일을 뿌렸을까, 두 세번쯤 사랑이와 행복이가 목격되었다.
하지만 두번은 잡힐 수 없다고 결심했는지, 바가지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려는데 눈치를 채고 그만 쏜살같이 도망쳤다.
뭐가 그렇게 잡히기 싫었는지, 엄마도 나도 실망이어서는 그냥 잡지 않기로 했다.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겠지 - 하곤 놓아주었고, 케이지는 주변에 햄스터를 키우는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쿨하게 놓아주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안전한 집을 두고 천적이 가득한 밖으로 나가다니 얼마나 미련스럽고 괘씸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너무 일찍 위험하고 아프게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밤마다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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