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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Feb 08. 2022

꽃이 피던 교환일기장

우리의 비밀가득하던 추억

90년대 초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불었던 돌풍이 있었으니,

바로 '교환일기장'이다.

함께 교환일기장을 쓴다는 것은 모임원 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들을 공유함으로써

쇠와 같은 단단한 결속력을 갖는 것으로, 우정 레벨의 최상층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연인과의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친구와의 우정이 가장 중요하던 그 시절

누군가 비밀스럽게 '나랑 교환일기장 같이 쓸래?'라는 쪽지를 건내거나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그마한 수첩 하나를 눈 앞에 건네는 일은 

그 어떤 고백보다 설레는 일이었다.


교환일기장의 유행에 따라 일기장의 형태 또한 빠른 속도로 진화해갔다.

맨 처음에 쓰던 노트는 가장 단순한 노트형태로, 숙제하는 공부노트와 똑같은 겉모습을 갖추고 있어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고 선생님 몰래 교환일기를 쓰더라도 걸릴 위험이 낮아서 몰래쓰기 적합도에 최상이었지만

언제든지 누군가 뺏어가서 내용을 읽을 수 있었기에 보안성은 최하점이었다.

그 다음 버전은 일기장 표지에 똑딱이 단추를 채우거나 끈으로 예쁘게 리본을 묶을 수 있는 형태였다.

반 친구 놀리고 괴롭히기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일기장을 들고 도망가더라도 

일기장이 펼쳐지기 전에 뒤따라 쫓아가서 되찾아와 내용유출을 간신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다음에는 드디어 나름 완벽한 보안성을 가진 일기장이 개발되었으니,

자그마한 플라스틱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일기장이었다.

일기장 옆에 채운 조그마한 하트모양 자물쇠가 제법 귀엽고 예뻐서 인기도 많았고,

우정의 증표로 열쇠까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데다가 슬금슬금 톱질로 자물쇠를 뜯어내기 전 까지는 아무도 내용을 읽을 수 없으니 완벽한 교환일기장이었다.


교환일기장에는그 시절 우리들의 취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정성스레 오려 붙이고,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리고 사방에 반짝이는 하트 스티커도 잔뜩 붙이고,
오늘 먹고싶은 간식(주로 떡볶이나 바나나우유가 인기였다)을 적어놓고 엄마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써두거나
용돈 받은 날이면 어디로 놀러가자는 둥의 소소하게 즐겁던 우리의 삶도 담겨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2년에는 역시 월드컵 스타들이 인기였는데 그당시 잘생긴 얼굴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안정환선수나 김남일선수가 온 페이지를 장식했다.

때로는 누가 나에게 못된말을 하고 못살게 굴어서 싫다거나,
담임선생님에 혼나던 날엔 '담탱이'라는 은어로 불만을 가득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연 가장 인기 콘텐츠는 누가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내가 누구를 짝사랑한다거나 하는 연애사였다.
교환일기장 멤버 중에 짝사랑을 하다가 결실을 이룬 사람이 있는 때엔
다른 내용들은 싹 빠지고 일기장엔 분홍색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 설레는 연애 이야기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짝사랑 이야기들은 언제나 보안 1등급이었기에
어느날에 누구라도 그 내용을 발설하는 날이면
교환일기장은 그대로 역사속으로 잊혀지고 멤버들은 뿔뿔이 공중분해 되기 일쑤였다.
발 없는 소문은 없다고 꼭 적어두면 결국엔 한달 안에 모든 반 친구들이 알게되어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는데,
소문이 퍼짐에 상처받은 친구들은 결국 내 소문을 퍼뜨린 친구들과 절교를 선택하거나
때로 대담한 친구들은 일부러 소문이 나라고 일기장에 퍼뜨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환일기장으로부터 이어진 커플들도 꽤 무수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교환일기장이 사랑의 큐피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6학년을 마친 멤버들이 중학교에 진학하자
교환일기장을 쓰는 일도 자연스레 종결되었다.

요즘은 실시간으로 SNS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만인에게 전하고,
더욱 비밀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가끔은, 이렇게 예전처럼 정말 소중한 친구들과 아날로그 손글씨로 시간차 가득 둔 소식들을 전해보고싶다.
새로운 소식을 기대하며 가지는 기다림의 시간에 충분히 설레고 충분히 내 삶의 기쁜 일들을 만지작거리며 글로 써내리고 싶다.


사각거리며 색색의 볼펜과 형광펜들로 교환일기장을 빼곡히 꾸며 채워내던 날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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