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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Mar 13. 2021

콘텐츠 기획자가 만든 공간, 경주상점

사실 그간 트래블코드에 공간 기획 제안이 많았다. 공간을 직접 기획해본 경험은 없지만, '퇴사준비생의 여행'을 쓰며 직접 탐방한 곳만 500여 곳이 넘기에 그 경험을 높게 사는 것이다. 트래블코드는 장소당 장장 수천자에 달하는 깊이 있는 글을 써야 하기에 그 어떤 곳도 허투루 보고 오지 않는다. 다른 곳과 무엇이 다르고, 이를 위해 어떤 작업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등 그 공간과 사업의 운영자로 빙의해 디코딩해 왔다. 우리도 언젠가 디코딩을 넘어 직접 공간을 인코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작년 말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사모펀드 한앤컴퍼니가 경주의 5성급 현대호텔을 인수해서 라한셀렉트 호텔로 리모델링했는데, 호텔 로비에 있는 편집샵을 기획할 수 있겠냐는 제안을 준 것. 그간의 공간 기획 의뢰가 서로 여건이 맞지 않아 불발되곤 했는데,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이 이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자로서 트래블코드의 아이디어와 기획 초안에 확신을 가지고 과감히 추진해준 결과다.

보문호수를 내려다보는 라한 셀렉트 호텔. 기존에 베이커리샵으로 운영되던 로비 공간 일부를 바꾸는 프로젝트였다.

클라이언트는 '장인다움'과 '지역다움'을 담아내면서, 고루하지 않고 팔리는 제품으로 구성하길 요청했다. 장인다움과 지역다움의 본질은 뭘까? 이동진 대표님과 함께 고민한 끝에 이 둘의 공통분모를 ‘시간’으로 잡았다.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하다보면 장인다움이 구현되고, 장소가 축적해온 시간이 지역다움을 만드니까. 그래서 '시간'을 중심으로 컨셉을 뽑았다.⠀

 오래된 오늘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제품을 파는 상점이다. 즉, 시간을 파는 상점. 상품 카테고리도 어떤 시간을 파는지를 기준으로 4가지로 분류했다.

'정성'을 다해 만든 제품

세월과 함께 숙련된 '장인'의 제품

오랫동안 사랑받아 '고전'이 된 제품

역사적 '상징'이 녹아있는 제품

상점의 취지를 잘 알 수 있도록 사이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성, 장인, 고전, 상징 4가지 카테고리가 의미하는 시간의 길이를 나이테로 표현했다. 정성은 1년, 장인은 10년, 고전은 30년, 상징은 100년. 각 나이테를 4등분하여 4개로 합쳐 로고로 만들었다. 컬러는 한국의 멋을 추구하는 라한의 방향성을 담아 색동 저고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4가지 카테고리가 나이테로 표현되도록 만든 로고




더불어, 제품마다 어떤 시간을 파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엽서로 제작해 벽 한 켠을 가득 채웠다.<퇴사준비생의 런던>에서 소개한 '메이드'에서 영감 받아 만든 엽서존으로, 엽서는 방문객 누구나 마음껏 가져갈 수 있다. 공간 구성 요소로서도, 콘텐츠로서도 의미있게 만든 것. 뒷 이야기가 풍부한 제품이라 가능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특히 협업이 많았다. 트래블코드는 전문 분야인 기획에 온전히 집중하고, 안희진 디자이너님
이 디자인 에셋 개발과 적용을 맡고, 진성훈 에디터님이 엽서를 작성하고, 더로컬프로젝트 이희준 대표님이 상품을 선별하고, 오승준 소장님과 한현수 대표님 등 prgm이 공간 설계와 구현을 도와주셨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신 덕에 믿고 프로젝트를 펼칠 수 있었고, 또 많이 배웠다.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엽서의 앞뒷면
4개 카테고리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포인트를 살려 간략히 적은 설명글도 제품마다 비치했다.
제품을 조합해 선물세트도 만들었다. 세트에 포함된 제품의 카테고리 색깔을 살렸다. 


호텔 전체의 상황을 고려해 변경되는 부분도 있었다. 매장명이 '오랜된 오늘'에서 '경주상점'(경주 제품만 파는 거 아니라는!)으로 바뀌고 제품이 빠지고 설계가 변경되는 등 구상을 온전히 펼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고마움이 훨-씬 컸다. 트래블코드가 전 세계 500여 곳의 매장을 다니며 쌓은 자산의 부가가치를 대폭 높일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으니. 개인적으로도 공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한층 깊어진 계기였고. 이제 트래블코드의 손을 떠나 라한셀렉트 호텔에서 운영한다. 우리가 기획한 첫 번째 공간이 또다른 길을 열어주길 바라며, 경주 갈 일이 있다면 경주상점에 들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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