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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Mar 13. 2022

트레이너와 트레이더 사이 그레이존

퍼스널 트레이너 김경수님의 플레이리스트

코로나19가 터지면서 2년간 받던 PT 수업에 제동이 걸렸다. 지금이야 영업시간 제한 정도로 방역 지침이 완화됐지만, 초기에는 몇 달간 헬스장 문을 아예 닫던 터였다. 이후 이런저런 일이 겹쳐 1년을 내리 쉬면서도 차마 환불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PT 선생님은 얼마나 힘들겠나 싶어서. 내 몸에 근육이란 게 있었던가 싶을 때쯤 겨우 복귀해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이 뜻밖에 씨익 웃으며 답한다. “저 헬스장 문 닫고 돈 더 벌었어요.” 인간사 새옹지마. 주식 활황기에 여유시간이 생긴 덕에 트레이너가 아닌 트레이더가 되어 로켓에 올라탄 것이다. 오히려 코로나19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선생님은 운동도 원리 원칙부터 파고드는 학구파인데, 투자도 착실히 공부한다. 해부학 전공책과 해골 모형이 있던 접수처에는 이제 두꺼운 투자책도 늘 함께한다. 요새 그가 즐겨 본다는 <코린이 유치원>은 투자 정보를 넘어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깊숙이 파고드는 유튜브 채널이다. “블록체인을 이용해 사업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 채널이에요.” 가독성은 개나 주라는 듯 글자로 빼곡한 섬네일에도 채널 누적 조회수가 백만이 넘는다. 이런 콘텐츠에는 어그로도 필요 없나보다. 선생님은 얼마 전에는 (옥탑방 빼고) 처음으로 볕이 잘 드는 집으로 이사했다. 집 안에 햇볕을 들이는 일이 이렇게 값비싸다는 것도, 그만큼 값지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가고 있다고.       

   


갑자기 열린 인생 2막에 신나는 일만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의외로 시큰둥해지는 지점도 생겼다고 한다. 차를 워낙 좋아해서 돈이 생기면 슈퍼카라도 지를 줄 알았건만 막상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모든 차를 전방위로 까는 자동차 리뷰 유튜브 <모트라인>을 보며 묘한 안도감이 들기까지 한다. ‘맞아, 지금 있는 차가 나한테는 딱이네’ 하는. 갑자기 돈이 아주 많이 생기면 내 욕망이 체에 걸러 내려지는 시간이 오나보다. 진짜 욕망과 가짜 욕망이 가려진다.  


어쩌면 당연히, 본업에서도 김이 빠진 눈치다. PT 수업 하나를 줄이면 그 시간에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 상황. 무르익어 성장 한계에 다다른 트레이너로서의 시간은 기회비용이 되고, 발 들인 지 얼마 안 된 트레이더로서의 시간은 성장이 눈에 확확 보인다. 누구라도 균형 잡기 쉽지는 않을 테다. 수업의 질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3년 전 선생님을 봤을 때 반짝이던 눈빛은 최근 들어 보기 어렵다. 이윽고 투자에도 미묘하게 시들해진 느낌이다. 요즘 무기력을 넘어 우울감마저 든다고 한다.  


지금 선생님은 트레이너와 트레이더 사이의 그레이존(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에 있는 건 아닐까. 선생님의 PT 수업 대상은 건강상 그레이존에 있는 사람들이다. 의학적 이상은 없지만 건강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몸의 변화를 살피지 못해 망가져간다. 이들에게서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변화보다 삶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겠다는 게 선생님의 운동 철학이다. 이제 운동뿐 아니라 삶과 커리어에 대해서도 그레이존 탈출 전략을 세워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먼저 우울감 극복부터. 선생님은 뭐가 재밌냐는 질문에 “제가 원래 좀 시니컬하고, 일상에서 즐거움을 잘 못 느끼는 편이에요. 그래서 즐거움 도구, 웃음 도구를 모아둬요”라며 게임 스트리머 <짬타수아>의 영상을 꺼내 보여준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서 촉수 스킬을 가진 캐릭터로 성공적인 플레이를 했을 때 ‘문어 문어~ 문어 여자!’를 외치며 문어의 촉수처럼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이다. 좋다. 이렇게 원초적인 리액션 영상이든 뭐든, 지금 그레이존에서 푹 퍼져버린 선생님이 어서 털고 일어나 한 발을 떼었으면 좋겠다. 사실 ‘화이트존’에 안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결핍을 가능성으로 만드는 건 결국 동력인 것을. 좋은 운동 선생님을 잃을 수 있을지언정, 인간 김경수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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