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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ul 19. 2022

템플릿은 따르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

통번역가 그 이상의 다재다능인 박재용님의 플레이리스트

박재용님은 11개 국어를 한다. 그중 2개는 능통하고 나머지도 매일 거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2022년 2월 버전으로 그렇고, 앞으로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외국어는 재용님의 인생 취미이자 생계다.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미술관 큐레이터였는데 어느새 통번역가의 비중이 더 커졌다. 예술계의 굵직한 통번역은 재용님이 두루 맡고 있다.


그런 재용님이 즐겨보는 유튜브를 추천받았더니 역시 해외 채널 비중이 높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기업, 역사를 비디오 에세이로 담은 대만 유튜브 <Asianometry>, 전 세계의 작은 집을 보여주며 각 나라의 사회, 문화를 들여다보는 <NEVER TOO SMALL>, 도시 계획의 관점으로 암스테르담과 다른 도시를 비교하는 <Not Just Bike>, 심지어 시카고 대학 유튜브 <The University of Chicago>의 강연 영상까지 섭렵하고 있다.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지 1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무려 6년 전 영상이다.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영상을 즐겨보지는 않는다. 나라면 해외판 <침착맨>을 보며 낄낄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공부를 위한 정보성 채널이겠지만, 재용님에게는 순수한 유희다. 추천 영상들의 공통점이라면 여러 나라가 등장한다는 점. 재용님은 나라별로 다른 점을 비교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을 어떻게 보는지 발견하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Not Just Bikes>의 Why City Design is Important (and Why I Hate Houston)


“<Not Just Bike> 운영자는 원래 캐나다와 미국에 살다가 지금은 네덜란드에 사는데요. 자동차 중심인 미국 도시에 엄청 열받아해요. 이건 연출이 불가능한 진심이에요.” 고작 800미터 떨어진 곳에 걸어가려다 쌩쌩 달리는 차 사이를 위험천만하게 지날 수밖에 없었던 휴스턴 출장기는 내가 봐도 열받기는 한다. 그런데 이 모습, 왠지 익숙하다. 재용님도 곧잘 같은 식으로 울분을 토했던 기억이 있다. 이를테면, “유럽 보면 전시 기획 1년 전부터 준비하거든요. 한국에서 그렇게 안 하는 건 진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선택한 거예요.” 같은 류의.


또 다른 언어를 할 줄 알면 삶에 선택지가 생기는 듯하다. 여기서 당연한 게 저기선 당연하지 않다는 걸 무시로 접하니까. 대안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인다. 한편으로는 눈에는 아른거리는데 손에는 닿지 않아 감질맛이 난다. 재용님이 종종 터뜨리던 울분은 이 간극에서 왔나보다. 그래서 재용님은 그 어느 곳의 템플릿도 따르지 않고 자기에게 꼭 맞는 템플릿을 만들고 퍼뜨리기로 작정한 듯 하다. 비록 그게 아주 수고로울지라도 말이다.


작년 여름에 재용님만큼이나 템플릿을 따르지 않는 사람과 ‘지속 가능 결혼’을 했다. 지금의 가족 템플릿으로는 도무지 각이 안 나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에, 감히 아이를 낳아 희망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새롭게 정의한 ‘가족’이 누군가에게 지속 가능한 템플릿이 되길 바라면서.



일단 결혼식부터 많은 이들에게 결혼식 템플릿을 늘려주는 데 성공한 듯 하다. 서울시로부터 공짜로 빌린 용산 공원에서, 이 결혼식만을 위해 하루만 쓰고 버리는 건 하나도 없게, 부모 혼주 대신 아이와 부부에게 지혜를 모아줄 10명의 결혼위원과 함께 하면서 말이다. 유능한 개발자를 붙여 커스터마이징한 청첩장 웹페이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닿아 암호 화폐로 축의금도 받았다. 참으로 수고를 마다않는 결혼식이다.


여러 언어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있는 재용님 덕분에, 1개 국어 구사자인 내 삶의 선택지도 늘어나는 기분이다. 재용님이 외국어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겨레21의 칼럼 '남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연재한 글을 옮겨왔습니다.

김주은 IP Producer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 PD가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유튜브 영상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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