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엄격한 게으름뱅이 이현주님의 플레이리스트
재택근무로 집에 오래 있다보니 엄마의 몰랐던 면을 발견한다. 하루는 온종일 부지런 떠는 엄마를 보다가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싫어하는 내 일하는 습관을 엄마가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할 때 강약 조절을 못하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부분에서 혼자 진을 빼곤 한다. 그런데 엄마가 옷이 안 상하고 깨끗하다며 한사코 ‘손’빨래를 하고, 전날 빨래를 안 해놓으면 선잠을 자다 일찍 깬다. 이게 피에 흐르는 거였어? 어떻게든 고쳐보려던 그간의 노력에 회의감이 들었다. 엄마도 육십 평생 못 바꿨다는데 내 인생을 스포당한 기분이다.
그냥 인정하고 만 나와 달리 이현주님은 그 ‘피’를 부정하려 일평생을 달려왔다. 대구 토박이인 그의 부모님은 갓 스무 살에 현주님의 언니를 가졌고, 가족계획의 목적지인 남동생을 끝으로 더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이 한 줄에서 짐작되는 둘째 현주님의 성장 환경은 안타깝게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모자란 건 부모였건만, 현주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끝없이 채우려 했다. “칭찬을 잘 소화 못해요. 연말마다 그해 받은 상장을 다 찢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저한텐 그분들의 피가 흐르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어요.”
현주님은 이 성장 욕구를 흥미롭게 풀었다. 아주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거다. 다방면에 전문가 수준으로 취향의 깊이를 내렸다. 한 예로 현주님 취향대로 손수 고쳐 탈바꿈한 서울 옥인동의 1979년생 연립주택은 명물이 돼 인근 집값을 높이는 데 일조할 정도. <마케터의 일> 저자이자 배민의 키치함을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남편 장인성님의 스타일링과 라이프스타일도 현주님 지분이 크다. 요즘에는 꽃꽂이에 꽂혀 거의 프로 플로리스트가 다 됐다.
언뜻 보면 그저 좋아서 고상한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가만 보면 매우 귀찮아하고 버거워한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과 게으른 천성이 싸운다. 현주님이 추천한 그림 유튜버 ‘이연’의 영상 ‘원동력을 믿지 마세요’에서는 무언가를 꾸준히 하려면 나라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장치를 만들라고 한다. 이를테면 이연은 한 가지를 진득히 하기 어려워하고 전환이 빨라 딱 질리지 않을 때까지만 할 수 있는 일 세트를 여럿 짜둔다. 그리고 즉각적인 성과를 봐야 하는 사람이라 그림을 그리고 유튜브를 한다. 나 자신을 키운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맞는 양육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귀찮아, 힘들어를 입에 달고 사는 현주님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부모였나보다. 집을 어질러두면 마치 남편이 ‘장모님도 이렇게 내버려두던데’ 하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당연히 남편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최근엔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그들을 미워하고 나 자신을 이겨먹으려고 싸우는 과정에서 어찌어찌 내 삶의 길이 만들어졌는데, 그 삶이 꽤 만족스럽거든요.” 이렇게 보자면 (모로 가긴 했지만) 어찌어찌 부모가 현주님을 키운 듯하다.
“요즘은 욕망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계가 있어야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것 같아요.” 현주님이 추천한 유튜브 채널 <헌팅 포 조지>(Hunting for George)의 영상 ‘오두막의 숨겨진 야외 목욕실’에서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스트레일리아 숲속의 작은 오두막을 소개한다. 현주님은 언젠간 몸에 꼭 맞는 집을 짓고 싶다고 한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성장 욕구에도 한계를 두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 정도 모순은 누구나 있지 싶어 말을 삼켰다. 그 모순까지도 현주님이고, 그런 자신을 양육하는 법은 본인이 가장 잘 알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