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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선 May 28. 2020

운명을 짊어진다는 것

영화 <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 &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펄먼의 성장 서사는 완고하다. 하이페츠를 사랑했던 이스라엘의 한 소년. 장난감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다 하이페츠와 똑같은 소리가 아니라며 토라졌던 네 살의 아이.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지만, 병의 흔적을 비껴간 두 팔. 이 모든 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을 테다. 이 휴먼 스토리 덕에 그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고, 유명세를 타며 줄리아드 음악원 도로시 딜레이(Dorothy Delay) 교수 앞에서 오디션을 치렀다. 언젠가 펄먼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방송 출연에 저는 아주 적합했을 거예요. 어렸고, 목발을 짚고 걸었잖아요. 나름 귀여웠고, 연주도 꽤 잘했고요. 흥미로운 조합이었겠죠.” 

딜레이에게 발탁된 펄먼은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레번트릿 콩쿠르 우승 이후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사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감독 앨리슨 처닉(Alison Chernick)은 “그에 관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에서는 말로만 듣던 그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야기가 살아서 움직이니, 이상하고 아름답다. 혹자는 진부하다고도 하는 그 서사를 함부로 평할 수 없도록 만든다.

영국 ‘가디언’ 지는 이 영화에 대해 “편견을 극복한 서사의 하모니”라는 평을 내놨다. ‘극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멈칫하게 된다.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 아픈 사람들은 ‘극복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극복이라는 단어가 괜히 불편한 건 결과에만 집중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과정의 순간이 단번에 휘발되는 기분.

영화에서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은 시간을 되돌아 걷는다. 먹고살기 위한 직업까지도 자신에게 맞춘 부모님, 학교 가는 것을 빼곤 연습으로만 채워진 어린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먼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연주는 꽤 좋지만 안 될 거야. 장애인이잖아.” 

노년이 된 펄먼의 눈에는 여전히 회색 슬픔이 멍울져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못하는 것만 보려고 했던 타인에 대한 원망일까. 성장기에 받은 상처는 몸이 자라면서 그 흉터 역시 비대해진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마침내 1958년, 그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는다. 진행자는 펄먼을 두고 이스라엘에 비유한다. 이스라엘이 수 많은 좌절과 장애를 ‘극복’한 것처럼, 이 소년은 신의 가호로 소아마비를 ‘극복’했다고 말이다. 펄먼은 씩 웃으며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본인도 귀엽다고 언급했던) 열세 살의 펄먼을 보고 있으면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 어린아이는 지금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얻어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하 다. 그토록 어린아이가 말이다.

대중은 대개 펄먼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메인 테마를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한다. 유대인 정체성이 강한 펄먼은 영화 곳곳에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한 바이올린 제작자가 펄먼에게 악기를 보여준다. 유대인 연주자가 쓰던 악기 내부에는 ‘히틀러 만세 1936년’이라는 글자와 함께 나치 표식이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이 동네 수리점에 악기를 맡겼는데 허락도 없이 표식을 새겼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연주를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펄먼은 단호하다. “이 악기에는 현을 연결하면 안 돼. 절대로.” 씩 웃지만 금세 차가워지는 펄먼의 눈빛. 에드 설리번 쇼에서 멘델스존을 연주하던 소년의 눈빛과 꼭 닮았다.

연주자가 사용하는 악기는 그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현재 펄먼의 악기인 스왈 스트라디바리우스(1714년 제작)는 그와 참 비슷하다. 도구 자국이 많이 남아있는 특이한 악기인데, 악기 제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깨끗하지만 약간 불균형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유기체 같은 느낌”을 준다. 펄먼은 아직도 악기의 대출금을 갚고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깨끗한, 불균형한, 그래서 자연스러운 펄먼의 일상. 전동 휠체어를 타고 얼어붙은 거리를 위태로이 달리는, 힘겹게 목발을 짚고 비행기에 오르는, 몇몇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그가 극복 과정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앨리슨 처닉 감독은 영화 제목을 <이차크와 토비(Itzhak and Toby)>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는 펄먼의 부인인 토비의 존재감이 크다. 두 사람은 메도마운트 음악학교 동기다. 토비는 음악 캠프에서 펄먼이 연주하는 라벨 ‘치간’을 듣고 한눈에 반했고, 이후 끊임없이 구혼했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일화. 마침내 둘은 결혼했고, 이후 50여 년 동안 함께 음악과 야구를 공유하며 시간을 새기고 있다. 무심결에 다가온 인연이, 함께 운명의 짐을 나눠진 길동무가 됐다. 

펄먼은 오랜 기간 세계를 순회하면서도 평범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금요일 밤에는 최대한 연주를 피하는, 그 사소한 배려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토비는 펄먼의 서러운 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함께 대화를 하다가 펄먼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낮추면, 토비는 늘 그의 편에 선다. 영화를 보다가 속수무책 낭만으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글_ 장혜선

사진 제공_ (주)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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