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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14. 2024

“긍게 사램이제”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1


지금 80~90대에 이른 이 땅의 아버지들은 격동의 근현대 시기를 이데올로기의 전장 한복판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고상식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기질과 성정 탓에 그 전장의 한복판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나머지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았고, 못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의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신이 어느 때 어떤 편에 서야 하는지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신념의 문제였을뿐더러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기실 자식 세대가 아버지 세대와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디어렵다. 나는 평생 빨치산 아버지 고상식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장례식장에서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하릴없이 아버지와 일심동체였음을 깨달아 가는 작중화자 고아리가 이 땅 자식 세대의 한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상당수의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면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2


나는 고상식의 일대기를 읽으며 그와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따라 살다 가신 우리 아버지를 계속 떠올렸다.


고상식은 구례 사람 삼분의 이가 나왔다는 중앙초등학교(아래 ‘중앙교’)를 35회로 졸업했다. 중앙교가 1908년에 개교했으므로,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고상식은 1930년생쯤 되는 인물이다. 우리 아버지는 1924년에 태어났다.


고상식은 일본 패망 직전 배급이 끊겨 생활고를 겪고 있던 중앙교 교장에게 쌀을 선물했다가 철도학교 가짜 졸업장을 보답으로 받았다. 그것으로 일제 말기의 무차별적인 학병 징집을 피해 보라는 뜻에서였다. 철도원이 된 고상식은 노조에 가입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가 1948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광양 백운산 일대에서 빨치산 생활을 했다. 이 혐의로 6년간 복역하고 나와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다가 죽었다.


우리 아버지는 불학(不學)으로 생을 마치셨다. 내게는 큰아버지인 당신 형이 다니던 학교(소학교)에 너무나 가고 싶어 며칠을 따라나섰다가 아버지(내 할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받으신 뒤로 학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학을 향한 소망을 진하게 토로하곤 했으나, 당신이 평생 벗으로 삼은 것은 연필과 교과서가 아니라 낫과 지게였다.


아버지는 한동네 살던 집안 동생과 함께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광복이 되면서 돌아온 후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대문간을 나가 날이 희부윰해져서야 돌아오는 부지런한 생활을 했으나 우리 집 형편이 조금이라도 피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년 전쯤에서야 평생의 벗을 손과 어깨에서 내려 놓으셨다.


3


‘빨갱이’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도 용서되지 않는 죄”(134쪽)를 지은 사람의 기호처럼 통용되었다. 고상식은 학교에서 선배를 통해 사회주의를 만났다가 평생 빨갱이라는 이름표를 화인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우리 아버지는 빨갱이와 무관해 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만약 죽은 고상식이 한동네 후배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이념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과 그에 따른 어두운 역사를 극복하자는 상투적인 목소리도 없다. 대신 작가는 한때 빨갱이였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이고 집안 사람과 마을에 온갖 고초를 안겨 주었던 고상식의 삶에서 이념이 아니라 ‘사람’을 보자고 한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137~138쪽)


4


현대의 고전이 된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는 집단의 도덕이 개인의 도덕보다 열등하다는 논쟁적인 문제를 던진 바 있다.


독일 목사이자 신학자로 반나치 운동을 펼치다가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한 디트리 본 회퍼(1906~1945)는 누군가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묵인한 대다수 독일 기독교인들을 들어 신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학살의 비극을 알고 극복하려는 사람들을 만든 이 또한 바로 그 신이다.


니부어와 회퍼 모두 신학자이면서도 사람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고상식의 입을 밀려 “긍게 사램이제”를 되뇌게 한 작가가 265쪽짜리 장편소설을 써서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도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들은 모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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