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여섯 날 남겨두고
그때 우리 스물넷, 스물다섯
1997년 가을, 제주 조천 조그만 마을 북촌에서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사람들이 많아 앉을자리가 없어 형미와 나는 창가를 보며 나란히 서 있었다. 드문 드문 바다가 보였다. 여러 명의 다른 일행도 있었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미안하게도 배경이 흐리게 처리된 사진처럼 가물가물하다.
창 밖을 보며 힐끗힐끗 형미를 보았다. 형미는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은 의자 모서리 둥근 손잡이를 잡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기를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 '동생 챙기는 착한 누나'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이 너무 번들거려요."
"음식 하다 급하게 나오느라..."
'동생 싫어하는 못된 누나'의 눈빛과 목소리가 아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리고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형미는 이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으라며 나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손수건을 받아 들고 '정말 닦아도 되나?' 속으로 생각했다.
"얼굴... 닦으라구요?"
내가 잘 못 들었을 수도 있고, 내 상상일 수도 있으니,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너무 번들거려서 ㅋㅋ, 괜찮아요. 얼굴 닦으세요"
"진짜 닦을 거예요."
"제발요 ㅎㅎ"
형미가 건네준 뽀송뽀송한 손수건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손수건에게도 미안하고 형미에게도 미안했지만, 얼굴을 닦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만에 처음 세수한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은 아내의 건강과 나의 안녕 그리고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어렵지 <아주 가끔은 어려울 때도...> 않은 길이다.)
"얼굴이 뽀얘졌네"
형미는 웃으며 말했다. 손수건을 달라고 했지만, 처참해진 손수건을 그냥 줄 수가 없어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했다. 형미는 그러라고 했다.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나는 손수건을 최대한 이쁘게 다시 접어 내 주머니에 넣었다.
별말 없이 버스는 다시 달렸다. 나는 약간의 뜸을 들인 뒤... 무슨 음악을 듣고 있냐 형미에게 물었다. 형미는 들어 보라며 듣고 있던 테두리가 얇은 쇠로 된 소니 헤드폰을 벗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Fleming and John 이였는지 Sixpence None the Richer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귀곡성'을 들려줬어도 G선상의 아리아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서 보니, 그래도 기왕이면 우리가 그 버스 안에서 들었던 음악이 Sixpence None the Richer 앨범의 4번째 곡이었으면, 그리고 마침 그 곡이 재생될 때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들으며 눈이 마주쳤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때 우리
그때 우리, 스물넷스물다섯, 그 버스 안, 손수건, 휴대용 시디플레이어, 주고받은 이야기들, 그걸로 충분히 뽀송뽀송하다.
스물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여섯 날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