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사랑을 너에게 줄 수 있어서
중학교 3학년이 된 조카는 최근 요리에 관심이 생겨 집에서 이것저것 만드는 중이다. 점심에 맛있는 거 해준다고 큰소리 빵빵 치며 앞치마를 입는 녀석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요리하던 조카가 ‘식사하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불렀다. 밥상 위에 예쁘게 오이를 잘라 플레이팅한 짜장면이 보였다. 그럴싸한 모습과 냄새에 '제법인데?'라고 말해주면서 자리에 앉았다.
언니는 임신성 당뇨와 싸우는 중이라 밀가루를 먹을 수 없어서 나와 조카 둘만 먹는 짜장면이었다. 조카는 어서 먹어보라며 기대의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짜장면을 먹는데 흠칫하며 조카를 바라봤다. 덜 익은 면에서는 밀가루가 씹혔고 짜장 가루가 덜 풀려 덩어리를 씹을 때마다 입 안에 가루들이 팡하며 터졌다.
“어때요?”
기대의 찬 눈빛으로 날 보는 조카의 모습을 보니 2022년 2월 28일, 내가 형부와 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기록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족, 애인, 친구, 직장동료, 지인으로부터 받은 애정을 기록한다. 어떤 행동으로 사랑을 느끼게 해줬는지,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신해 사용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등 누가 언제 어디서 나에게 어떤 말과 행동으로 애정을 표현해 줬는지 상세하게 적는다.
글에서도 느껴지겠지만,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핸드폰, 공책에 저장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애정을 받았던 내용만큼은 캘린더에 매년 반복하기로 알람을 설정한 채로 저장한다. 사람들에게 받았던 소중하고 따스했던 감정들을 잊고 살다가 기록한 알람이 울리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그들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근 잊고 살았던 추억 하나가 알람으로 울렸다. 2022년 2월 28일, 그날은 형부와 언니에게 난생처음으로 돈가스 덮밥을 해준 날이었다. 참고로 나는 요리에 ‘요’ 자도 모르는 똥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언니는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지만, 그날따라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열정이 가득했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호기롭게 요리를 시작했다.
점심 약속이 있어 내 몫은 따로 만들지 않고 오직 둘을 위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엉성한 칼질로 양파는 채를 썰고 계란을 풀고 돈가스를 튀기고… 이때까지는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수월해서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다. 원래 예정했던 간장 소스 대신 쯔유를 쓰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량은 간장 넣는 양과 똑같이 하면 된다는 위험한(..) 발상을 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문제는 중간에 맛도 보지 않고 소스를 돈가스와 밥이 들어간 그릇에 들이부었다는 것이다.
겉은 그럴싸한 돈가스 덮밥이 완성되었다. 요리하는 내 모습을 보며 걱정했던 언니는 생각보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안도했다. 밥 위에 돈가스를 올려 크게 한입을 먹던 형부와 언니는 흠칫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음식을 먹자마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둘을 보며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랐다.
“소스가 짠가 보다! 어쩌면 좋아… 미안해. 먹지 마.”
나는 그들에게 덮밥을 회수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형부는 밥그릇을 꼬옥 안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냐. 돈가스 덮밥 너무 맛있다. 시간 내서 맛있는 거 해줘서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형부는 정말 맛있다는 듯 열심히 덮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니도 맛있다고 잘 먹겠다며 인사를 했다.
“약속 시간 늦겠다. 빨리 가봐.”
언니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에게 빨리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억지로 맛없는 돈가스 덮밥을 다 먹을까 봐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언니에게 장문의 내용으로 카톡을 보냈다. 먹지 말고 버리라고. 미안하다고.
친구와 만나 맛있는 점심을 먹으니 맛없는 돈가스 덮밥을 먹는 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밥 먹고 카페에서 즐겁게 수다를 떨 예정이었지만, 이 마음으로는 도무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집에 온 나를 보며 언니와 형부는 왜 이리 일찍 왔냐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가서 남아있던 소스를 한입 먹었다. 내가 알던 맛있는 쯔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물을 먹지 않으면 도무지 넘길 수 없는 수준으로 짰다. 이걸 형부와 언니에게 대접이랍시고 만들어 주다니… 음식을 싹 비운 그릇을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네가 처음 해준 음식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버려. 신경 쓰지 마.”
그들은 연신 나에게 괜찮다 맛있게 잘 먹었다 시간 내서 요리 해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 마음이 너무 예쁘다며 토닥여주었다. 그날의 일을 기록하며 내가 받았던 사랑을 반드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00이 덕분에 맛있는 음식 먹네.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면이 비록 덜 익었지만, 소스가 달콤하니 먹을 만했다. 과거의 내가 저지른(?) 짓과 비교한다면 조카가 훨씬 실력이 좋았다. 나와 정반대로 짜장면을 먹는 조카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는 것을 느낀 언니가 짜장면을 한입 먹었다.
"어휴, 이거 면도 덜 익고 짜장 가루도 덜 풀렸네. 먹지 마."
조카와 나의 밥그릇을 치우려고 하는 언니의 손을 저지하며 밥그릇을 꼭 안았다.
"건들지 마. 내가 다 먹을 거야. 진짜 맛있어. 네가 해준 음식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버려."
그 말을 들은 언니는 자기가 했던 대사를 내가 그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음을 빵 터트렸다. 언니와 형부가 해줬던 것처럼 조카가 만든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녀석은 수줍게 웃으며 '고맙습니다. 이모'라고 말해주었다. 나야말로 시간 내서 맛있는 음식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요리 잘한다, 멋지다는 말을 덧붙였다.
언니와 형부에게 받았던 사랑 플러스 나의 애정을 듬뿍 담아 조카에게 주었다. 잊지 않겠다고 기록은 했지만 소중하고 따뜻한 애정을 다른 이에게, 그것도 조카에게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조카는 비록 요리에 실패했지만,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나중에 더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나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언니와 형부 덕분에, 조카 덕분에 받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기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