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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성휘 Mar 13. 2024

0화 : 수술이 미뤄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의 제왕절개 수술 일자가 미뤄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나도 언니도 형부도 조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열 달의 길고 긴 여정을 끝으로 3월 12일, 언니는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용이(태명)를 만날 예정이었다. 분명 그랬다. 


아이의 크기가 주 수에 비해 커서 자연분만은 어렵다는 답과 동시에 제왕절개 일자가 정해졌다. 예정일보다 10일 정도 이른 날짜였지만, 언니가 노산+태아의 크기+부정맥 소견이 있기도 해서 날짜를 미룰수록 산모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알겠다고 답하며 언니와 형부는 본격적으로 입원할 때 필요한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집안은 태어날 아이를 위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칙칙한 어른들의 물건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보송보송한, 깨발랄한 느낌이 가득한 아기용품들을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미혼인 내가 봐도 타이니 모빌을 귀엽고 깜찍했다. 아기 침대에 작고 소중한 용이가 누워 모빌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을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기도 했다. 그런 나와 달리 부정맥 소견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불안해하는 언니를 토닥이며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는 아기 침대 좀 보라며 억지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새로운 가족에 대한 기대, 혹 언니와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지? 라는 불안한 감정이 휘몰아치던 날들이 지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밤낮이 바뀐 백수라 오후 한 두시쯤에 겨우 일어나는 내가 언니를 배웅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오전 7시에 기상을 했다. 눈곱을 뗄 생각도 못 하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거실에서 분주하게 마지막으로 짐과 집,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된 조카를 챙기는 언니를 향해 걸어갔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러 가는 언니를 꼬옥 안아주었다. “용아! 우리 이제 곧 만나자”라고 말하며 부풀어 오른 배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긴장한 표정을 짓는 형부에게 “화이팅!”이라고 말해주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이 떠나고 조카에게 간단하게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집을 나서는 조카에게 손을 흔들며 학교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모든 이들이 떠난 후 나는 방을 보러 온 세입자가 된 기분으로 텅빈 집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언제나 왁자지껄했던 집에 나 혼자 남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언니의 동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자고 다짐했다. 어젯밤 형부가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를 했다. 청소기로 바닥 한번 쓸어주고 물걸레질했다. 언니가 부탁한 빨래를 해주고 대충 끼니를 채운 후 다음 주에 갈 제주도 여행을 위한 짐을 싸기 위해 캐리어를 꺼냈다.


짐을 싸는 동안에도 의식적으로 계속 핸드폰을 힐끔 쳐다봤다. 오전 10시에 수술이라는 언니는 오후 1시가 넘어가도록 연락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다면 분명 형부가 뚱이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주면서 누굴 제일 많이 닮았는지 알려달라고 했을 텐데…… 정신 없나보다. 괜찮을 거야. 나는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길어지는 침묵은 불안을 만든다. 그 불안은 최악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것은 그 최악이라는 소재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내버려둔다는 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쁜 상상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때쯤 징징, 하고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언니였다. 형부가 아닌 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당황스러움, 걱정, 불안한 감정이 가득 담긴 채로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00야, 나 수술 미뤄졌어……”

“수술이 미뤄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한 건 집 가서 말해줄게.”

다시 언니가 집에 온다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목소리가 영 좋지 않은 언니를 붙잡고 자세히 말해달라 할 수가 없어서 우선 알겠다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초조한 마음에 손발이 저리고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형부는 지친 표정이었고 언니는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수술이 밀린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나는 설마 했던 것이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고 말았다. 부정맥, 그것이 문제였다. 4년 전 언니는 과거에 큰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수술을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갑작스러운 부정맥이 왔었다고 했다. 꽤 심각했는지 예상했던 수술 시간보다 3시간이나 오버되었고 마취과 선생님과 수술 집도한 담당 주치의 선생님들이 고생을 꽤 했다고 전달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는 또 부정맥이 정상 범주로 돌아와 딱히 약을 먹으며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 부정맥이 얼마나 위험했었는지 잊어버린 채 잘살고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 화근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언니의 부정맥은 아주 특이한 케이스여서 개인병원 마취과 선생님도 접해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고. 게다가 대학병원에서 수술 당시 사용했던 부정맥 치료제는 현재 구비가 되어 있지 않고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기 때문에 심장내과 담당 의사가 없어 혹여라도 수술 도중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처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결론은 대학병원 전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학병원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을 너도 나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의료 파업이 우리 가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언제나 힘든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형부가 말을 더듬거리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산부인과 담당 의사 선생님도 대학병원 전원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으니 우선 언니 부정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약품을 배송받은 후 수술을 하는 쪽으로 결과를 내셨다. 언니는 알겠다고 기다리겠다고 대답했지만, 형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보호자 면담을 했을 때 자신 없어 보이는 마취과 선생님의 말씀과 태도에 절망했고, 이런 사례의 산모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말에 확신했다고 했다. 자기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는 없었다. 형부는 전화기를 붙잡고 이곳저곳 알아보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진료 당시 부정맥은 임산부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안도했다.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나비효과인가 싶지만 이미 늦었다. 예정일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고는 하지만 언제 양수가 터져 아이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대학병원 전원에 실패하는 경우, 진료 받고 있는 개인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약품이 오기 전까지 3일이 걸린다. 그러나 언니같은 산모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아른거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접고 부디 아이가 건강히 배속에서 잘 버텨주기를 기도해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속에서 머리가 멍해졌고 가슴은 답답했다. 


시댁 부모님들에게 전화해서 나에게 했던 설명을 또 하는 형부와 언니를 보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봐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언니를 안아주고 긴장해 차가워진 손을 마사지해 주며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해줄 뿐이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해서…… 내가 문제라서……”


언니는 자신을 탓하며 훌쩍거렸다. 울면서도 배를 쓰다듬고 아이를 생각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참았다.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용이도 잘 버텨 줄 거고 나도 형부도 열심히 알아볼게. 언니는 언니 건강이랑 용이 생각만 해.”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가 뭉치는 것 같다며 침대에 누워 있겠다고 말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만날 설렘은 잠시 뒤로 미뤄 두었다. 수술이 미뤄진 것처럼. 그리고 그 자리에 불안과 초조만이 가득했다. 우리 잘 이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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