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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성휘 Mar 31. 2024

0화 : 취업 말고 제주도

취업을 피해 제주도로 여행을 갑니다.

 

 “이제 앞으로 뭐하고 먹고 살 거야?”


 노릇하게 구워진 갈비 한 점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고 있던 찰나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기를 구워주던 형부는 나와 언니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본인의 일에 집중하(는 척 하)기 시작했고, 눈치가 없어 맨날 혼나던 조카도 싸늘한 분위기를 읽은 듯 수다스러운 입을 꾹 닫고 조용히 식사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지막 고기가 될 지 모를 갈비를 낚아채듯 집었다.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가 천직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백수 8개월 차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 달 정도 쉬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2023년에서 2024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번아웃이 크게 와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몸도 삐그덕거리며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그저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퇴사했고 몸이 건강해진 다음 바로 직장인으로서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게 이리 길어질 줄은 몰랐다.


 쉬는 동안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책을 읽다가 졸리면 낮잠을 잤다. 이따금 책 읽는 것이 질릴 때면 넷플릭스에 상영하는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등 온갖 영상을 보면서 OTT 채널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짧고 굵게 도파민에 취하고 싶을 때는 유튜브와 인스타를 봤고 이젠 영상이 지겹다고 할 때쯤 그것들을 대신할 존재로 게임을 선택했다. 이런 불규칙한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은 불어난 몸과 슬슬 바닥이 보이는 통장 잔고였다.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던 그녀가 나의 쉼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8개월 동안 참아준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로 구김 없는 미소를 짓는 일이었다. 


 “계속 모아둔 돈 까먹으면서 쉴 수는 없잖아. 네 앞으로 한 달에 나가는 돈만 얼마니? 아르바이트라도 하던가. 저번에 말했던 곳 어때? 언니랑 친한 사람이 일하는 헬스장 데스크 알바. 나한테 연락  왔더라. 동생 아직도 쉬냐고.”


  언니는 그곳 헬스장 데스크 아르바이트가 얼마나 꿀인지, 시간도 괜찮고 시급도 적지 않다말과 친한 지인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어 일이 수월할 것이다,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없지 않냐며 8개월 정도면 충분히 쉰 것이 아니냐, 취업은 언제 할 것인지 등등 잔소리를 가득 담은 융단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공격을 당한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인상을 찌푸리면 안 되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나는 표정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아찔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바이트 제안은 언니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납짝 엎드리며 조심스럽게 거절한 후, 취업에 관해서는 생각중에 있었다는 말을 끝으로 식사를 서둘러 끝냈다.








  식사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가 책을 읽었다. 그러나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빤히 쳐다보며 언니가 했던 말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기적적으로 복권에 당첨되지 않고서는 계속 백수로 살 수는 없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싫다는 듯 자꾸 뭉그적거리며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수 생활을 끝내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불현듯 제주도라는 세글자가 뇌리에 스쳤다. 


  3년 전,  '저 더는 못 해 먹겠어요. 퇴사하겠습니다!'라며 직장 상사에게 사직서를 집어 던지고 그날 바로 짐을 챙겨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 직장 상사와의 트러블, 그로 인해 받은 부당한 대우들. 상처 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도망뿐이었다. 가족, 친구, 나를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육지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었다. 그 순간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제주도였다. 


  그때 당시 코로나가 절정이었던 시기라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그곳밖에 없었고 귀신에 홀린 듯 제주도 티켓을 끊었다. 일주일로 계획했던 여행은 무려 한달이나 늘어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을 피해 제주도로 도망쳤던 기억. 그 추억이 갑작스럽게 툭 하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도망친 제주도는 기대 이상으로 나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지기 시작했고 지금 아니면 못 간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어느 순간 책상에 앉아 취업을 피해 제주로 여행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언니가 여행을 보내줄 수밖에 없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 명분은 바로 나의 베스트 프렌드, 주주였다.


   18년이나 함께한 우리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를 같이 간 적이 없었다. 예전부터 가자고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었다. 때마침 그녀가 4월부터 바빠질 예정이라 자주 볼 수가 없다고 아쉽다는 말을 언니에게 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몰랐다. 주주에게 제주도 같이 가자는 카카오톡을 보냈고 대답은 '오케이'였다.


   J인 주주와 여행 일정을 계획할 때만 J가 되는 나의 성향이 만나 순식간에 렌트카, 날짜, 여행 코스, 비행기표, 숙소가 정해졌고 결제까지 끝나버렸다.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친구를 팔아(?) 임시방편으로 쉴 틈을 만들긴 했지만 결국에는 현실이라는 문제 앞에 직면해야 하는 것을 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미룰 수만 있다면, 마지막을 제주도로 보낼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언니에게 이리되었다고 말하곤 4월부터 제대로 취업 준비를 하겠다며 우는 시늉을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대답한 언니를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며 애교를 부렸다. 나의 방탕(?)한 8개월을 묵묵히 기다려준 소중한 가족이었다.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지만, 아주 잠깐 언니의 잔소리에서 멀어져 마지막 최후의 휴가를 보내기로 다짐하면서 취업이라는 현실을 잠시 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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