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버리기엔 너무 길고, 이대로 살자니 되게 어중 띤.
SF가 대유행이다. SF작가라고 하면 '또 하나의 오타쿠'를 이르는 점잖은 말이거나, 작가지만 '취미 활동'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위기였는데(feat. "그래서 진짜 직업은 뭐예요?"), 이제는 뭔 얘길 해도 SF가 묻어야지만 대세 작가, 준비된 제작자가 되는 것 같다. SF 이야기에는 늘 디스토피아만 나오는데 SF 시장에 이런 유토피아는 처음이지 싶다. SF작가들은 이런 '예견하지 못한 미래'를 살며 어떤 기분일까? 곽재식 작가는 올 해에만 3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곽재식 작가가 SF만 쓰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빠질 때를 모르는 게 나의 흠이지만, 낄 때는 그래도 껴야겠기에, 나 역시 직업적 이유로 온갖 SF레퍼런스와 증빙(?)자료들을 뒤적이게 됐다. 정말로, SF를 보다보면 인류를 싹 쓸어버리기 위한 온갖 종말의 가설이 다 등장하는데, 이야기적 허구와 사이비적 가쉽들 사이에서 월드3라는 실재하는 슈퍼컴퓨터의 지구 종말 예언을 보게 됐다. 월드쓰리.... 인류에게 믿음을 주기엔 한참 부족한 이름인 것 같긴한데, 아무튼 이 월드3가 요새 지구 돌아가는 꼴을 보다가, 지구는 2040년에 멸명할 거라고 결론냈다고 한다.
2040년..... 생각할수록 애매한 종말이다.
차라리 "야, 내후년이란다!" 라고 하면, 당장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맹세하고는, 없는 돈이나마 2년 정도 쪼개 쓰면서 알뜰살뜰하게 놀텐데. 1년 쯤 놀다가 '아무리 종말이지만 너무 쪼들리는데...' 싶을 즈음엔, '미리 죽어버리지!'라며 세상을 떠난 부자들의 주인 없는 트리마제를 전전하며 한달살이를 해보기도 하고. 뭐, 망설였던 고백을 해봐도 좋겠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도 종말 직전에 거절의 예의를 차리긴 쉽지 않을테니, 그거야 말로 될놈한테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하고 싶은 것만 하거나' 뭐- 본인의 성향에 맞춰 정하면 될 일인데, 2040년이라면......아껴쓰기엔 너무 길고, 그렇다고 지금처럼 일하자니 벌써부터 아깝고 억울한 기분이다. 고작 죽음을 기다리자고 현재를 참아내야 하는건가?! 그건 또 너무 아깝잖아!!
2040년의 나는 어떨까. 젊은이도 아니라서 디스토피아의 광기에 휩싸이기엔 쑥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한탄하자니 산 세월이 모자라서 노인들과 어울리기도 힘들 것 같다. 이러기에도 저러기에도 애매한 마음을 SNS에 적고 어설픈 현자 흉내나 내면서 '좋아요'에 기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진짜 싫다. 그냥 혼자서 아직 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망하기를 기다리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계획이나 세울까..... 죽기 위한 계획들만 세웠는데, 그랬는데 2040년이 됐는데 망하지도 않는다면?!!
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망하기를 기다리는데 망하지 않게 되다니....!!
소행성이 운 좋게 지구를 비켜가 버리거나 핵폭발을 했는데 내부 결함으로 위력이 감소했다거나... 아무튼 다행이라고 박수를 쳐야 할 일에, 망연자실 뉴스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칫 지구 재건 사업에 소집돼서 의무 노역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아....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월드3가 뭐때문에 망한다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뭐... 지구 상황이 안 좋아서 인류가 살 수 없는 상태라고 한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에 운석이 충돌할 수도 있다. 하지만 SF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운석은 잘못 날아온 신발에 맞듯 그렇게 바로 날아오는 게 아니다.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는 십수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누군가는 그 사이에도 매일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죽는다는 걸 진짜로 믿게 되고, 뭘 하지 않으려던 사람도 뭘 하려고 안간힘을 쓰긴 할 것 이다. 100세 만기 보험증서를 갈기갈기 찢고 성에 안 차는 환급금을 받아 진탕 써버릴 수도 있다. (나라면, 그 돈이면 차라리 피아노를 한 대 사면 어떨까. 피아노 학원은 문을 닫아서 가르쳐 줄 사람은 없겠지만.) 마구잡이로 탈색을 하거나 아예 새치머리를 방치해 버리는 사람도 늘어날 것 같다. 굳이 공들여 아침마다 고데기로 머리를 말 것 같지는 않다. 아니지, 누군가는 그럴수록 더 공들여 머리를 할 것 같기도 하다. 종말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면 결국 무언가를 하고 싶어질테고, 그러다보면 미용실도 다시 열고, 피아노 학원도 문을 열고.... (덕분에 나는 피아노를 좀 더 제대로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달라질 게 없는 것 같다.
지금도 저렇게 사는 사람은 저대로, 이렇게 사는 사는 사람은 이대로 살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냥 내가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고, 사실 그것도 또 언제 바뀔지도 모른다. 그냥 죽지도 망하지도 않았을 뿐이다.
모두가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