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가 모아온 경력의 시작.
올해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만 12년이 되는 해이다.
야근과 주말출근에 벌벌 떨던 12년 전의 나는 여전히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지만, 가끔은 내일의 나에게 업무를 미루는 너스레를 떨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익명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물경력'에 대한 고민글을 보았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어 댓글을 작성하던 중 차라리 브런치에 적어보자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렇다. 오늘의 주제는 '물경력'이다.
구글에 물경력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물경력에 대한 정의, 고민, 해결방법에 대한 유튜브 등 너무나 많은 콘텐츠가 쏟아진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경력에 관심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에게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첫회사에서 호된 업무 강도를 겪고 꿈은 개나 줘라며 안정적으로 보이는 회사에 입사했던 3,4년 차 주니어 시절의 '물경력' 이야기다.
나의 첫 회사는 디지털 광고회사였는데 언젠가 아트디렉터가 되고 싶었던 나는... 야근과 주말출근, 상사의 폭언, 폭행, 술강요 등을 2년 반정도 겪고 광고에 학을 뗀 상태였다. UI/UX 디자이너로 전직을 하려는 상황에서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아 어느 중소기업의 GUI 디자인 프리랜서 업무를 맡게 되었고 포폴 쌓아보려 시작했다가 덜컥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
회사에 입사할 때, 나는 세 가지를 간과했다.
첫 번째, 내가 이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그래서 업무 내용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세 번째,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부서에 없다는 것을 무시했다.
이 세 가지는 나에게 화살로 돌아온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인데, 물경력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GUI 디자이너로 입사하면서 상사에게 오픈마켓에 올라가는 상세페이지와 이벤트 페이지를 만드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광고회사에서 했던 일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입사 후, 나는 인쇄물과 패키지 디자인, 제품 로고, 제품 설명서.. 심지어 현수막, 전단지까지 만들고 있었다. GUI 디자인은 프리랜서 때 했던 작업 이후로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알고 보니 제품 GUI가 한번 결정되면 바뀌지 않는 곳이었다.
입사 반년 정도는 야근 없는 삶에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홀로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크고 작은 설움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간과했던 첫 번째, 회사를 오래 다닐 것이라는 다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그리고 두 번째 간과했던 '업무내용'이 화살로 돌아온다. 이직 생각이 들었지만 내 이력은 정말 애매했다. 광고 디자이너에서 GUI 디자이너... 도 아니고 뭔가 이것저것 하는 잡다한 사람. 마지막으로 세 번째 화살, 업무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회사에 없었다.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일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 브랜드의 모바일 웹사이트가 없다는 것에 주목해 업무 업적이 필요했던 부장님을 설득해 최소한의 비용만 쓰는 것을 조건으로 모바일 웹사이트를 구축하기로했다. 기획과 디자인은 내가 맡고, 개발은 웹페이지 운영 개발을 하던 파트너사에 맡기기로 했다.
기획서를 작성해 본 적 없지만 지인들에게 샘플 자료를 구하고, 웹 서치를 해서 매일 ppt로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디자인을 했다. 굉장히 간절했던 순간들이었다. 대단한 걸 만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모바일 웹사이트라도 포폴에 넣지 않으면 진짜 내가 망해버릴 것만 같았다.
웹사이트가 완성된 후, 나는 다음 회사를 정하지 않고 퇴사를 했다. 내가 회사를 다닌 기간은 11개월 2일, 인사팀에서는 한 달만 더 다니면 퇴직금이 나오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나의 4년 경력은 광고 디자인(배너, 이벤트 페이지), 애매한 인하우스 디자인(GUI, 패키지, 인쇄, 현수막, 전단지, 상세페이지....)라는 물경력으로 꽉 차버렸다.
남들에 비해 뒤처질 수 있는 경력이지만, 나는 이 경력들이 밉지만은 않다. 광고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디어 발상이나 카피를 쓰는 일이 많았기에 지금도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과 가벼운 카피를 적는 일엔 자신이 있다.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했기에 깡다구도 생겼고, 나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7번의 이직을 겪으며 수없이 작성한 이력서에 이 회사들을 지우지 않고 함께 하고 있는 이유도, 내가 나의 이력에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쁜 경력은 없다. 어떤 경력일지언정 미래의 나에게는 그것들이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는다.
물경력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환경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단 하나를 놓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걸 꺼내서 갈고닦아, 이력서와 자기소개에서 녹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다음 스탭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은 것이니까.
아, 나의 퇴사 이후는 어떻게 되었냐고?
장밋빛 경력이 가득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살짝 언급한 것과 같이 나는 7번의 이직을 겪었고, 오늘 이야기한 회사는 두 곳뿐이다.
다음 주제가 생각나면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