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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re Jun 21. 2023

일상단상 #13. 반듯한 숲

나는 반듯한 사람하면 아직도 네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반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 처음엔 아마도 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너의 집으로 들어갔던 그 날. 

이리 오래 기억에 남을지 몰랐을 아주 평범한 이야기. 


초록 대문 앞에 서서 "어머니,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우리는 노란 장판이 깔린 방. 작고 둥근 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공책 두 권을 펼쳐 맞닿아 두면 가득 차던 그 작고 둥근 상. 네가 철제 필통을 딸각-하고 열면, 그 안엔 가지런히 정돈된 연필이 있었다. 칼로 올곧게 다듬어진 연필과 그 뒤로 착- 알맞게 꽂혀 있던 플라스틱 모나미 껍데기. 검은 줄 위로 반듯하게 써 내려간 글씨. 한 손으로 공책을 탁- 받치고 힘있게 지워 내려가던 슥슥- 지우개 소리.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 초침과 방을 채운 고요함. 작은 체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던 너. 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꺄르르 웃음소리마저도 정갈했다. 네 등을 가득 채웠던 네모난 빨간 책가방, 한 발 한 발 쌓아가던 단단한 걸음걸이.


이런 기억이 신기하기도 하지. 우린 고작 초등학생이었는데. 그날 집으로 돌아가 바로 "어머니, 다녀왔습니다."를 실천했던 것을 보면, 어린 나에게 너는 아주 강렬한 기억이지 않았나 싶다. 그 뒤로 나는 종종 연필깎이 대신 칼로 심을 다듬었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집 안의 모든 몽땅 연필에 볼펜 껍데기를 끼워 필기를 했다.


특히, 나는 네가 무언가 적을 때를 가장 좋아했는데 학교에서도 가끔 그런 너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나란히 땅을 딛고 있던 실내화. 가지런히 모아둔 다리. 곧게 핀 허리.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채 고개. 지난 너의 방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쪽 팔로 책상을 탁 받치고는, 너는 그 몽땅 연필을 들고 쉬는 시간에도 언제나 무언가를 적어갔다. 


그럼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네 자리로 가 물었다.

"뭐해? 나 봐도 돼? 너는 글씨가 참 예쁘다." 


성인이 되고 난 뒤, 마을버스 안에서 네 뒷모습을 보게 됐다. 사실 우리에게 큰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창밖의 네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여전히 너는 반듯했다. 뒷모습만으로도 네가 아닐까 싶었으니. 너와의 기억은 이게 전부이지만, 나는 반듯한 사람하면 아직도 네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너는 반듯하지만 둥글었다. 웃고 있었지만, 들떠 있지 않았다. 차분한 너의 공기에서 나는 너만한 숲을 보았다. 사람이 다른 무언가가 된다면, 너는 숲이 되겠구나 싶었다. 네 반듯함은 나에게 있어 아무도 가보지 못한 깊은 숲 속 같았다. 초록 잎이 무성하게 반짝이고, 맑은 물결이 찰랑거리는 숲. 낮에는 따스한 해가 비추고, 밤도 어둡지 않은 그런 숲. 


이제와 생각하면. 너와 깊게 친해지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테고, 실은 내게도 그런 숲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을 테다. 너는 반듯한 숲이었고, 나는 그 숲을 좋아하는 조그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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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숲> ‘반듯한 숲’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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