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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re Jun 28. 2023

일상단상 #14. 여름비

신발장에는 물기 없는 말끔한 우산이 여름비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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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네" 

여름에 내리는 비는 반갑다. 솨아아- 시원한 빗소리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창문을 바라본다. 


이 계절에 쏟아지는 비는 시원하고, 푸르다. 주변을 가득 채운 후덥지근한 공기는 하늘의 흐름을 바꿔 뜨거운 아스팔트의 열기를 식혀준다. 초록빛 나무는 한층 선명해지고, 그 아래서 올라오는 흙내음은 더 진해진다.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살짝 열어 비와 바람소리를 듣자 하니, 에어컨 바람이 호로록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 사이에 서서 "집이 가까웠다면, 비를 맞으며 걸어가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어린 날에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산을 챙기는 일도, 애매하게 젖어 들어가는 바지도, 꿉꿉한 실내 공기도, 착 가라앉는 앞머리도.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날. 비를 맞고 집에 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고 없이 내린 비에 얼마 남지 않은 집과의 거리. 빗속을 뚫고 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펼치고 폴짝폴짝 뛰는 수밖에. 그리고 횡단보도에 멈춰 섰을 때, 나는 더 이상 두 손을 올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막연히 비가 오면 우산을 펼쳐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때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나를 보면 다른 것들은 돌아볼 수 없었던 그런 시기. 


비를 맞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보슬보슬과 우수수 내리는 중간 사이의 빗줄기에,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거리도 알맞아야 하고, 신발도 무겁지 않아야 한다. 물론 가방에 전자기기도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나만의 간단 절차를 거치고 나면,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기에 딱 알맞은 상태가 된다. 서둘러 뛸 필요도 없고, 빠른 걸음으로 슥슥슥 걷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걸음으로 집까지 가는 길을 충분히 즐기면 그만이다. 


비를 흠뻑 맞고 싶은 날. 

그렇게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안고 집에 도착한다. 찰싹 붙어버린 옷을 벗고, 따뜻한 물로 느긋하게 씻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연다. 작은 컵에 차가운 생수를 콸콸 따라 한 잔 들이켠다. 창 밖은 여전히 빗소리가 한창이고, 채 가시지 않은 흙냄새도 풍겨온다. 좋아하는 바이닐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나면, 약하게 돌려놓은 선풍기 바람이 솔솔 분다. 


신발장에는 물기 없는 말끔한 우산이 여름비를 기다린다.  



<반듯한 숲> ‘여름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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