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
내게도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접시를 닦고 찬장에 포개 넣는 찰나에 어떤 익숙한 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쓸쓸히 걸어가는 어렴풋한 형체가 왠지 스물다섯에 만난 그인것 같다.
무릎을 굽히고 떨어진 볼펜을 줍는데, 순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이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 특유의 입가의 주름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반나절 동안 뇌리에 머문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행동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연상작용이 어떤날은 좀 더 강한 자극이 될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감당할 수 없었던 예전의 고통이 내 감정을 지배하고 순간 현실을 멍하니 부유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단지 과거의 기억 때문이라 탓해도 소용없다.그 기억은 결국, 곧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생하게 날것으로 느끼니 그럴 수 밖에.
그것이 데쟈부 때문이다. 라고 변명할 때면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언제 어디선가 했던 것 같은 경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게 뭐든 전생이든, 아니면 다른 평행차원의 내가 느낀 것이든 설명할 수 있다면 있는대로 다 끄집어내 갖다붙이고 설명하고 싶어진다.
누구나에게 과거의 힘든 시절은 있었다.
그 시절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그 기나긴 터널 끝에 한 줄기의 빛이 찾아온다는 구원을 믿지 않는 평범한 중생들은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이 생생한 기억과 고통이 사그라들고 희미해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이 불변의 진리가 통용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의 흐름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파편처럼 순간순간 나를 덮친다면? 이것은 일종의 환상도 정신착란도 아니다. 그저. 시간의 배열 때문이다.
이 기이한 현상을 수십년전부터 책이든 만화든 영화에서든 표현하려고 애써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타임리프를 하는 소녀가 미래에 분명히 사랑하게 될 한 남자를 알면서도 떠나보내는 장면, 어느 머나먼 행성에서 순식간에 수십년이 흐르던, 빼곡히 들어선 책장의 블랙홀에 갇힌 아버지가 딸과 조우하는 ‘인터스텔라,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 남편의 죽음 후에 달콤한 짧은 재회. 라든지...
시간과. 기억...
이 두가지 모티프는 언제나 앞으로도. 그렇듯이 매혹적인 소재다. 그런데 여기에 외계인 접촉 소재라니...
(참고 : 이 영화의 원작은 테드 창의 단편소설이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84502)
이제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영화인들에게 일종의 범접할 수 없는 위인이라는 명당 자리에 올라선 듯 보인다.
이 감독의 영화를 설명할 때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의 음악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시카리오’ 에서도 그랬다. 그의 배경음악은 묵직한 첼로의 음과 기계음 그 중간 어디즈음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고막을 긁는 반면 고저는 단조롭다. 질질 끄는 듯한 느릿느릿한 속도감의 음악은 신기하게도 팽팽한 긴장감을 더해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광활한 대지를 한 앵글로 담아, 이질적이면서도 대자연이 가진 고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연출이 ‘시카리오’ 에서도 눈부셨다지만 ‘컨택트’ 이 영화에서는 그 어떤 전작에 논할 것 없이 더욱더 농염해졌다고 해야하나.
루이스는 읊조린다.
더이상 시작과 끝이 같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차분한 어조로.
그녀가 바라보는 까만눈동자의 그 작디 작은 아기의 일생은 그녀에게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이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전부 하나하나 그녀의 기억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치명적인 희귀한 병으로 죽어갈 어린 딸의 운명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려고 했었던 그 루이스의 처음과 끝은 결코 일직선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아이는 결국 그녀곁을 떠나갈테지만 그 과거는 현실로, 미래에서 다시 실재로 매 순간 마주하게 될 것이기에. 루이스는 그 재회의 기회를 놓칠리 없다.
시간의 배열이 과거, 현재, 미래의 수순이 아니라 뒤섞인 상태로 존재한다면. 마치 시간이 혼재된 투명한 상자에서 삶의 키워드가 적힌 카드 한 장을 뽑았을 때 그것에 연상되는 기억 혹은 일어날 일들이 주르륵 펼쳐진다거나,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 내가 그 기억들을 모조리 갖게 된다면? 루이스에게 외계어 해독 능력이 주어졌을때 (무기를 받았을때) 그녀는 어떤 말로 섕 장군을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 전화를 건 그 순간 떠오른 말은. 아마도 어느 다른 차원의 그녀가 평행선상의 시간의 조합으로 터득하게 (깨닫게 된) 된 것 같다. 아마도. 섕 장군이 그녀에게 귓속말을 할 때. 그리고 그녀가 과거에 섕 장군에게 무전 통화를 할 때 그 시간이 교차하면서 생긴 균열을 다른 차원의 시간이 시간 위로 포개지듯이. 그렇게 시간의 빈틈이 채워지고 시간의 그물은 더욱더 촘촘해진다. 그렇게 얽히고 섥힌 시간의 망이 삼천년을 거듭해 나가다보면... 어떠면 햅타포드 종족의 언어를 터득하게 된 지구인이기에 햅타포드 외계종에게 큰 도움을 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는 그녀가 애초에 갖게 된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갖게 될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다.
미래와 현재가 엇물린 그녀가 현실을 살아 낼 때, 그 기억의 혼재와 혼란은, 꿈으로, 연상된 기억으로, 현실의 잔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마치 우리가 때때로 향기로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가늠하듯이. 낯선이의 흔적에서 과거의 연인의 손길을 느끼고, 사랑하는 내 아이의 얼굴에서 어린시절의 내게 내 부모가 웃어주었던 그 미소를 본다.
그녀는 영화속에서 자문한다. ‘그 아이는 누구지?’
이 물음의 끝은 시간의 흐름이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을 때.
인류의 힘으로만은 알아낼 수 없는. 결코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는 이질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정처없는 여정이라것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텅 빈 허파로 느껴내야만 한다.
도대체 이 아이의 시작과 끝. 은 그녀의 삶의 키워드가 적힌 카드의 어느 부분이란 말인가?
드니 빌뇌브가 선물 해 준 이 두시간은 우리에게 펼쳐질 인생의 행로를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지적인 호기심으로 충만하도록.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 준다. 물론 여기에 외계’ 미지에 대한 생경한 스릴은 덤이다.
루이스는 말한다.
“잊고 있었어요. 당신의 품이 이렇게 따뜻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막 사랑을 고백한 이 남자가.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부모의 곁을 영영 떠날것이며,
이 남자와도 이별을 하게 되는 이런 처참한 결말. 이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그럴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당신에게 안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저 그 따뜻했던 품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뿐이라고 위안받으며 다시 안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미래를 볼 수 없음이.
적어도 과거의 기억은 미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그저 과거의 기억으로. 존재한다는것이.
기억이 현재. 그리고 결국 내 미래안에서도 온통 내가 마주하는 실체로 존재 할 수 있음을.
그 오롯이 내 것이 될 시간들이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