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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Feb 10. 2024

게걸스럽게

언젠가부터, 일주일에 서너 번은 들리는 곳이 있다. 동네의 한 복지형 마트인데. 그곳은 물건에 붙은 가격표의 색깔을 따라 돌아가면서 50 퍼센트 할인을 한다. 이번주의 할인색은 녹색, 다음주는 빨간색, 그 다음주는 노란색과 같이.


그날은 검은색 가격표가 붙은 책을 할인하는 날이었던가. 실로 오랜만에, 꽤 괜찮은 품질의 책들이 몇 권 들어와 있었다. 문학동네와 같은, 문학 쪽의 좋은 출판사에서 파는. 고풍스러운(내가 좋아하는 고동색이나 검은색과 같은) 예쁜 편집본의 문학서들이 몇 권 탐스럽게 꽂혀 있었다(피아노 치는 여자등의 책이었다.).


복지형 마트라서, 판매가는 고작 삼사 천 원 정도였다. 하지만 가격표의 색깔만, 이번 주의 할인 컬러와 맞다면 거의 이천 원 정도에 각 책들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컬러가 바뀌는 다음 주 월요일을 기약해 보기로 하고 그대로 돌아서 나왔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월요일에 가보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새롭게 맞은 그 주의 할인 컬러도, 눈여겨 보아 두었던 그 문학 책들을 할인해서 살 수 있는 컬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생각했다. 과연 삶은 ‘지금’밖에 없는 것이구나. 다음부터는 그냥 보이는 대로 사야겠다. 지금 눈 앞의 것들을 갖지 않으면 더이상 내것이 아닌 것들로 나의 시간들에서 사라져가겠다.




시간은 다시 흘러 오늘, 그 책장 앞에 또 한번 서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작지만 소중한, 얼마 만큼의 돈이 들어온 차였다. 이렇게 정신이든 물질적으로든 가난한 날들에, 나는 다 잊어버리고 책들을 사곤 했다. 그런 일을 마술처럼 신비롭게 느끼며 몰두하곤 했다. 책을 뽑아 들고, 펼치고, 엉거주춤 서 있는 채로, 불완전한 채 그대로 몇 줄을 읽어나가고, 그렇게 엄선하여 고르고, 마침내 몇 권의 책을 결제하는 일. 그건 생을 내가 아직 굳게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때만큼 풍요롭게 책을 집어들 수는 없지만 두터운 털장갑을  손으로, 나는 문득 다시 한번 게걸스러워지고 싶었다. 잠시 책장 앞에서 게걸스러워  것인가,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새삼 깨달았다. 게걸스러울  있다는 것은 여유와 행복이구나! 그것의 여유와 행복이 이렇게 절절하게 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거의 난생처음이라고   있었다. 나는 , 그것이 풍요로움인지도 각성하지 못할 정도로 게걸스러울  있었으니까.


게걸스러움, 천진난만함, 순진무구함. 그런 것들은 내면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던 사람들만, 그득한 사랑을 받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덕목이구나. 일종의 특권층의 행복과도 같은.




게걸스럽게. 게걸스럽게. 나는 한꺼번에 몇 권씩의 책들을 집어 들었다. 너댓 권씩 한 손에 꽉 들어올 만큼 집아들고, 읽을 만한(그래도 나름의 기준과 취향에 맞는것들을 세심히 관찰하며) 책들을 뽑아서 펼쳐보고, 파란 플라스틱 쇼핑 바구니에 넣거나 다시 책꽂이에 꼽아두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3미터 높이의 두 개 진열대를 샅샅이 뒤졌다. 이번에는 할인하는 책들만 집어들지 않았다.정말 읽고 싶은 것, 어쩌면 지금 뽑지 않으면 영영 뽑지 못할 책들을 거침없이, 주저없이 뽑아 들었다. 게걸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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