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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Feb 21. 2024

희망에 대해





낯선 희망


지난 주일. 14년여만에 설교를 했다. 다만 내게 관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신 것이 확실해 보이는(내게 얼마만큼의 관심과 애정이 있을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몇 분들이 설교는 잘 했느냐며 인사말을 주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이내, 의아했다. 그런 희망찬 물음이나 인사말이 이제 내게는 낯선 것이 되어 있구나- 새삼 깨달으며 어리둥절해 하는 나. 그런 자신이 유체이탈한 듯 3인칭으로 보였다.


‘오늘의 삶’에 대해. 생에 대한 감각과 희망,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에 대해 무뎌질 대로 무뎌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 수렁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던, 아득한 날들 속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쩌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큰 이벤트도 새로움도 아니었던. 그런 참이었다. 전혀 설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생이나, 신이나, 사람에게 뜨거웠던 날들에 그것은 수도 없이 생각하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설교 피드백 들려주셔야죠. 이번주 설교 잘 했으리라 믿습니다. 형 이번주 설교는 잘 마치셨나요? 어떤 기대감에 차있는 듯한 밝은 인사가 도무지 생경했다. 마치 노총각의 결혼이나 고전하던 사업가의 큰 해외 사업 수주 소식을 듣고 안부를 물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말들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아직은/아직도 살아있구나.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권태. 무기력감.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낙관과 비관, 달관” 세 가지의 감정이 뒤범벅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낙관하다가 비관하다가 달관하다가, 비관하다 달관하다가 다시 위태로운 낙관을 붙잡는. 우울증을 앓는 동시에 조증을 앓는 사람 같기도 했다.


도저히 차분히 나를 읽어나갈 수 없는 날들.


그리고, 그런 인사말들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달관에 가장 많이 쏠려 있었구나. 정말 내가 생에 그렇게 큰 의욕이나 성의는 없는 상태였구나. 아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물어봐주셔서 감사해요. 어떻게 무사히 넘어갔어요.(마음의 독백: 너무나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지만, 저에게나 청중에게나 뭐가 그렇게 새로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주에는 한번 설교 좀 해주세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부조리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꽉 쥔 주먹에는 그렇게 낙관과 비관과 달관, 세 가지의 조약돌이 들어 있었다. 생에 대한 낙관은 틈틈이 설교에 쓸 만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메모를 하게 했고. 생의 비관은 성서의 주석 공부를 하지 않아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했다. 달관은 그 모든 것들의 빛과 그늘을 하나로 기워서 태연하게 틀을 맞추고 청중 앞에서 읽어 내려가게 했다.


놀랍게도 나는 설교가 시작되기 전 거의 30분 전까지 원고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자취집의 화장실에 앉아서 말이다. 실로 카뮈나 누구의 부조리에도 뒤지지 않는 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나 태도가 성의가 없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의 중요성이나 엄중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준비 기간 내내 설교단에 서서 언어를 읽어나가는 동안 긴장을 얼마나 했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버벅거렸는지. 나는 결국, 초임 시절 강지영 아나운서의 홍명보 감독 인터뷰 편에 버금갈만큼 횡설수설했다.


주근깨, 까무잡잡한 피부, 산발한 금발 머리, 눈을 감고 웃고 있는. 택시 안에서 흔들리는 약간 오싹한 인형.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인형 아래 써있는, 도무지 인형의 괴이함과는 모순되는 오늘도 무사히-란 문구처럼, 거룩한 소임이 그저 무사히 지나갔다는 데 나는 만족했다. 그것을 대하는 나의 부조리와 무력감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전 같으면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에 괴로워했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았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외로웠다.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절대자와 나뿐이었다.






궁극의 희망


지인과 긴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주제 의식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렘이었다. 오랜만에 이성적인 설렘을 느꼈다고. 그런 설렘이 삶에 대한 의욕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것 같단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인과 나는 일단의 교집합을 갖고 있었다. 정도나 종류의 차이는 크게 있겠지만, 무기력감이나 권태, 불안, 절망 등의 거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의 어두운 감정들과 싸우고 있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익숙하고 편안한 동시에, 막막할 만큼 두렵기도 한, 싱글 자취생이란 점 등이었다. 나는 그의 거의 모든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에 대한 희망이 삶 자체에 대한 의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10대 때부터 느껴온 바였다. 그 사실 자체가 새로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10대와 다를 바 없이 그때의 심장으로 가슴이 뛸 수 있다는 것, 이성적이거나 성적으로 동요되고 뒤숭숭해질 수 있다는 것. 새삼스러울 것 없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각성이 새삼스러웠다.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래. 그런 감상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데 반갑게 서로 공감하고 확인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세 계약을 연장하듯 생의 계약을 잠시 연장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최소한의 확인 같았다.



 정도 선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실은 조금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는 시도를 하고 싶기도 했다. 상황상 전화를 끊게 되었는데, 내가 꺼내보고 싶었던 화두란, 정말 렵고 진지한 질문이었다. 통화할 시간이 충분했어도 꺼낼 엄두가  나는 이야기였다.


이성에 대한 기대감처럼 생에 대한 의욕까지 불어넣는 희망과 욕망이, 만일 내가 그저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에 순진무구하게 희망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막상 그 꾸러미들을 다 끌어안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별것이 아니어서 재미가 없어지고 권태가 오면. 그때는. 그때는, 어떡하지. 그때도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를 이렇게 계속 찾으려고 할까. 찾아야 할까.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아주 궁극적인 희망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 낙관이자 비관이자 달관인,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삶을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는, 실은,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은 올곧고 고지식한 성품을 가진 나였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있었다. 온통 의문이었다. 선명하고 진정한 희망이 없어도, 어쩔 도리 없는 가느다란 연명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내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명랑한 영미 기독교식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의 내용을 모르는 것도, 그것이 내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토록 순수한 신앙의 힘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이제 자신에게 진지해지고 정직해져야 했다. 그러고 싶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정말 힘을 가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관주의자였고, 그래도 답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잠잠히 서 있다는 점에서 생과 사를 모두 누구보다 낙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애씀과 열심으로는 더이상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달관하게 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극단주의자이자 본질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다. 지금의 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은 아주 궁극적인 희망일 뿐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오늘은 위태롭기만 하고, 이 위태로움을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갈 자신이 없어 두렵기도 하다. 생이나 절대자에 대한 믿음도 그렇지만,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이 위태로움은 정말 끔찍하다. 정직한 희망을 찾지 못하면, 명절 아침부터 편의점 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자시며 역한 본능의 이야기를 하시는 술주정뱅이 아저씨와 나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성질머리 같아서는 이 울렁거리는 현기증의 날들을 정말 어떤 식으로든 끝장내버리고 싶다.




그러니까 절대자시여. 삶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부디 좀 그것을 알려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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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린덴의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의 한국어판 번역자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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