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든 시작은 냄새로
킁킁
하나의 시리즈 안에서, 모든 글의 시작을 향기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글. 어떤 경험이나 이야기를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라 향기로 이해하고 말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향기, 이 주의 향기, 또는 이 달의 향기나 한 계절의 향기를 써나가 보면 어떨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용과 형식은 제한하지 않되 시작은 언제나 향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에세이를. 킁킁거리게 되는 문장들로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스스로 바라보기에 글쓰기에 관한 자신의 가장 도드라진/어쩌면 거의 유일한 재능은 묘사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험에 대해 내가 느낀 인상을 표현하는 일을 나는 늘 즐거워했다. 어쩌면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경험에 대한 감상을 거칠게, 거칠게 써나가며 흥분하곤 했다.
무채색의 경험은 그러는 동안 색이 덧칠해지고 정말 잘 써진 글은 찰나, 반짝였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인상파 화가가 붓터치를 하는 순간들처럼, 꿈꾸듯 쓰다가 지쳐 대충 SNS에 올려버리고 잠들곤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들을 반복하며 아련히 느낄 수 있었다. 삶이 아무리 다채로울지라도 하얀 화면에 문장들을 거침없이 채워나가는 순간들의 느낌을 정확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은 몰랐지만, 혼자 문득 들었던 생각이나, 보았던 장면이나, 대화나, 인상, 냄새 같은 것을 묘사하는 법은 좀 알고 있었다. 그런 글을 나름대로는 부단히 써왔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채색을 넘는, 잿빛의 날들이 이어졌다.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다 사라졌다. 영혼의 풀과 꽃들이 산불에 타버린 산림처럼 완전히 전소된 날들이었다.
그러한 날들 속에서도 일기나 에세이라고 불릴만한 글(나는 낙서라고 부르는)을 조금씩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꿈을 그리는 일도, 꾸는 일도, 꿈도 아니었다. 이전의 설레는 글쓰기는, 그렇게 감쪽같이 내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변모된, 괴물같기도 하고 징그러운 나방 같기도 한 글들이 희미한 전구 불빛에 붙어 펄럭일 뿐이었다.
물감이 많아도 짤 수 없었다. 뚜껑을 돌려 열어 막힌 알루미늄 뚜껑을 푹 찌르고 팔레트에 짜, 붓을 푹 묻혀서 스케치북에 그려야 하는데. 파리하게 의미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얇고 희미한 4H 연필의 무채색 그림만 그리곤 했다.
무채색, 무채색.
그러다가 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사는 게 아니구나. 사는 것은 꿈을 꾸는 일이고, 그것이 없으면 ‘사람’의 삶이 아니구나. 꿈과 삶에 대한 그토록 당연한 비밀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것의 사라짐을 통해서 말이다. 꿈을 꾸지 못하면 뭐 하러 살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면 왈칵, 왈칵. 황량한 꿈의 불모지에서 그것의 부재를 알고도 어쩔 도리 없이 열병 같은 무기력증을 앓곤 했다.
무채색 무채색, 왈칵 왈칵.
무채색-왈칵-무채색-왈칵.
녹차 비누를 손에 묻혀 씻으면 손에서 녹차 냄새가 난다. 라벤더 사람을 만나면 내 구석 어딘가에도 라벤더 향이 입혀진다. 글쓰기란 어쩌면 향기를 입히는 일일 것이다. 기억에, 경험에, 나에게 말이다.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는 무언가를, 콜드플레이의 색처럼 강렬한 색이 있는 무언가를 써야겠다. 나는 냄새에 매료되는 사람이었으므로, 냄새 + 묘사 = 흥미로운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향수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읽으면 되니까. 공부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면 되니까. 그래서 일단 이렇게 킁킁 원을 쓰게 되었다.
꿈을 킁킁, 냄새를 킁킁. 무채색과 무기력과 절망을 킁킁. 다 맡아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