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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Mar 11. 2024

캐리어

1 편





1



서울 도심. 지하철역과, 커다란 쇼핑몰과, 유명 외제 자동차 대리점이 있는 곳. 오피스텔과, 화려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높다란 주상복합 건물이 행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복과 풍요로 가득한 한강 남쪽의 도시. 사람들이 늘 붐비는 활기 가득한 쇼핑몰의 1층이었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번쩍이는 금빛 금속 바디의 유리문이 있었고. 바로 그 출입문 옆 돌벽 아래 한쪽에 캐리어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낯설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쇼핑몰의 출입문 옆 한쪽에 캐리어가 휑하니 놓여있는 풍경은.



캐리어는 검은색 거친 천 재질로 되어 있었다.  두 개의 바퀴와 두 개의 검은색 고무 지지대가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 위를 안정적으로 딛고 있었다. 길이 조절 손잡이가 뽑힌 채, 배 쪽을 보이고. 누군가 황급히 볼 일이 있어 잠깐 세워둔 것처럼 말이다.



성율이 쇼핑몰에 혼자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러 1층의 금빛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던 5시경에도, 여유롭게, 천천히 천천히 스프링롤과 함께 소고기 쌀국수를 다 먹고 나오던 6시경에도.



그는 무심하게 무거운 금빛 문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리포트도 쓰고, 쉬면서 소정에게 전화도 하면서 오래 머무르려면 카페는 스타벅스로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그대로 있네? 누가 잠깐 놓고   아니었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나다니는 곳인데, 신경 쓰는 사람이 이렇게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많은 사람  그냥 지나친 거야? 주인이 잠시 옆에 놓고 전화하다가 깜빡 잊고는 통화하면서 어디 멀리로 가버렸나. 화장실 같은 데라도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런 곳에 누가 몰래 폐기물 쓰레기로 버릴 리는 없을  같은데.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걷기의 관성을 따라 그대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2



그때 마침 소정에게 전화가 왔다.



나 끝났어, 성율아.

- 아, 야근한다더니.. 벌써?


과장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신지, 야근은 내일로 미루고 모조리 칼퇴근하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쫓기듯이 나왔어. 지금 어디야?

- 장지역 쪽에 있는 와우몰인데. 오늘은 리포트 할 게 있어. 소정아.. (소정에게 미안한 듯) 안 그래도 레포트 하다가 너한테 전화하려고 학교 도서관 안 가고 가까운 스벅 가려고 했었는데.


그럼 내가 지금 스벅으로 갈게. 장지역 와우몰 안에 있는 거 말하는 거지?

- 같이 있으면 나 다른 할 일 하나도 못 하는 거 알잖아. 멀티 정말 못하는 거 뻔히 잘 알면서. 한 학점이라도 펑크 나면 이번 학기에 졸업 못해, 소정아. 졸업 못하면 H기획 공채 합격도 취소고, 그럼 우리 계획들 다 어긋나잖아.


그럼 레포트 잘 쓰고 이대로 헤어지던가...




성율은 이런 소정에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성율을 정말 좋아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성율의 면전에서 자신과 온 세상을 대결 구도에 놓는 일을 즐기곤 했다. 처음에 그것은 귀여운 사랑싸움 같은 것이었다가 나중에는 학대의 성격으로 진화해 나갔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소정이 관계를 장악하게 된 것은 그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소정 대 세상 모든 것'의 논법으로, 점점 더 가학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잔인한 양자택일 논법은 연애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뚜렷이 잦아졌다.


소정이냐-세상이냐-선택하라 촉구의 카드는 처음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해 사용되었다. 백일,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와 같이 결정적인 날들에 말이다. 처음에는 축구와 소정, 고등학교 동창모임과 소정, 잠과 소정 같은 것이었다가, 점점 일주일 치 용돈과 소정, 중요한 리포트와 소정, 취업 준비와 소정 등으로 치달아 갔다. 아슬아슬한 날들이었다.




그래. 리포트 잘 쓰고, 헤어지자.


성율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처음이었다. 성율이 소정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듯 말한 것은. 그는 오랫동안 소정이란 행성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었다. 기쁘게, 슬프게, 즐겁게, 무력하게, 기꺼이, 또 억지로.


그는 소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정의 억압에 대한 그의 저항의 최선은 '하는 듯'까지일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고 싶은 듯, 연락을 안 받는 듯, 소정이 아닌 친구에게 가는 듯, 소정을 안 만나고 리포트를 하는 듯. 늘 뭐뭐 하는 듯-일 뿐이었지 뭐뭐 했다-라는 단호한 서술어와 함께 구두점을 찍지는 못했다. 소정은 그 점을 잘 알고 이용했다.


그는 소정이란 구심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그것은 중력의 승리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아직도 실은 그녀가 아닌 무언가를 선택할 용기를 내지는 못한 채였다.


전화를 끊자 스타벅스 방향과 전혀 다른 쪽으로 한참을 걸어와 있었다. 어려서부터 선비 같았던 성율은 약간의 관계적인 갈등에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힘들어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는 것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도. 소정과 신경전을 펼치며 전화할 때마다 알 수 곳에 다다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곤 했다.


성율이 약한 부분은 멀티 플레이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길치였다. 더욱이 이곳은 낯선 동네였다. 집 평수가 넓은 팀원의 집에서 팀플 과제를 하며 밤을 꼬박 새우고도 모자라 오전까지 과제를 하고, 점심쯤 잠들어 오후에 몇 시간 자고 나온 터였다.


친구들과는 헤어졌지만 그는 혼자서 또 밤을 새우며 다른 과목의 4학년 기말고사 대체 레포트를 하고 졸업논문도 조금이라도 써야 했다. 그전에 허한 속을 달래려고 국물 요리를 찾다가 고른 베트남 쌀국숫집이 와우 쇼핑몰 안에 있었다.


쌀국수로 겨우 속을 달래기는 했지만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몽롱하고 찌뿌둥한 저녁, 게다가 날이 이제 완전히 캄캄해져 가는데 이곳은 어디인지. 마침 사과폰의 전원마저 나가 버렸다.


이럴 때면 늘 성율이 쓰는 방법이 있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결심한 듯 돌아 서서 지역의 랜드마크 같은 그 쇼핑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와 통화한 시간은 15분 정도였는데, 똑바로 난 길을 따라 겨우 5분 정도를 걷자 금세 쇼핑몰이 보였다. 갈 길을 잃어가던 그의 마음처럼 통화 내내 두서없이 걸으며, 정처 없이 헤매며 이곳까지 온 것이다.


잔뜩 굳어있는 마음과 몸의 긴장이 풀리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조금 참다가 스벅 화장실을 갈까. 쇼핑몰에 거의 다 와가는데, 쇼핑몰 안의 화장실을 가고 편안한 마음으로 스벅에 갈까.




성율은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먹는 것을 참고, 잠을 참고. 화장실을 참고. 마음에 정말 흡족한 대학에 가기 위해 청춘을 참고. 정말 좋아하는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 작은 데이트들을 참고. 정말 가고 싶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정말 좋아하는 소정과의 데이트를 참고.


정말을 위해 정말을 참았다. 참고 참았다. 그렇게 참았는데, 눈을 뜨고 하루가 시작되면 또 참아야 했다.


끙끙거리던 마음이 한계에 다다르던 날들이었다. 소정과 전화를 끊던 순간은 울고 싶은 마음이 어떤 절정을 터치한 순간이었다. 그때. 독백처럼, 오랫동안 마음속에 묵혀 두었던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참고 싶지 않아. 참기 싫어. 편하고 싶어.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어.

쇼핑몰 화장실부터 갔다가 리포트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는 거야, 성율아?

아니 안 해 버리면 안 돼?

졸업, 좀 안 하면 안 돼?

취업도 결혼도 좀 천천히 하면 안 돼? 아니 또, 정말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다 안 하고 싶어. 하기 싫어. 다. 전부 다.


살래.

살고 싶어.

나 좀 살고 싶어.

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뿌옇게만 보이던 시야가 거짓말처럼 맑아지는 것 같았다.




와우몰이 드디어 가까이 보였다. 쇼핑몰 내부의 화려한 전구빛이 완연해진 바깥의 저녁 어둠에까지 새어 나와 비추고 있었다. 금빛 유리문이 보였다. 그리고 저 옆에 검은색 캐리어. 아직도 그대로였다.


평소 같으면 또다시 지나쳤을 텐데. 이번에는 궁금함을 참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큰 캐리어를, 도시 한복판에 두고 간 걸까. 수많은 행인들도 궁금했지만 하나같이 모두 호기심을 억누르며 지나쳤다. 성율이 쇼핑몰을 들어오고 나가며 그랬던 것처럼.


성율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돌벽 앞에 놓인 캐리어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네임카드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영문으로 이름이 적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중요한 것은 전화번호였는데, 정작 전화번호가 쓰여있지 않으니 이름까지 자세히 볼 필요는 없었다.  


캐리어에는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었다. 뭐가 들어있기는 한 건가? 한 번 손잡이를 잡고 번쩍 들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열어보기는 꺼림칙하고, 들어서 좀 무게를 가늠해 보면 주인이 있는 것인지 내용물이 무엇인지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높이 솟아 있는 길이 조절 손잡이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뒤덮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은 아주 이상한 서늘함이었다. 불안함보다 안정감에 더 가까운. 언젠가 이 순간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뒤섞인 듯, 아주 편안한 서늘함. 본능적으로 성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캐리어 옆 자크 사이로 길게 삐져나와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검은색 천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득히 소름이 끼쳤다. 금세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떨림보다 강했고, 그것보다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윤리 의식이 더 강했으니까, 어차피 멈출 수는 없었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목을 길게 빼고는, 눈을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어스름한 어둠 속이어서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우두커니 서서 볼 때와 달리 어쨌든 천은 아닌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려 눈의 초점을 더 맞춰 보니 하나의 조각이 아니었다. 빗자루 솔처럼 갈래가 많았다. 검은색 실 같은 느낌이었지만 실이라기에는 올들이 너무 얇았고, 거칠었고, 숱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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