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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Apr 03. 2024

엄마성과 집 나간 삼촌성




최근에 지인 목사님이 소개해 주신 교회에 주일마다 나가게 되었다. 정확히는 나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돕게(도움 받게) 되고 있기까지 하다.


지금은 간단한 한 가지 생각만 메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교회는 어떤 곳인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즉 그것을 내가 무엇으로써 이해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고 그것에 관해 무엇을 목말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최근 깨달은 것에 관한 것이다.


내가 추구해야 하는 신학이란 철저히 내 밖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철저히 정진해나가며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넓혀가야 하는 무엇이라면,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움이고 내 안에 스며들어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또 철저히 돌아가는returning 것이고, 옛것이며,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어쩌면 비정의롭기까지 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을 사랑(용서)과 정의(심판), 두 가지의 차원의 전혀 다른 성품을 다 가진 분으로 말하듯, 교회에 대해 이해할 때도 서로 모순되는 두가지 차원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교회는 친교와 섬김이 잘 되어있는데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다소 억압적 분위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교양과 지성이 주된 분위기이고 신학적으로도 정통적이고 건강한 신학을 잘 섭취하고 있는 구조인데, 정의와 예절의 감각이 너무 웰-밸런스드 되어있다 못해 교회의 문턱이 낮지 않게 느껴지고 친교도 건조한 곳 말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교회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이 각자의 요소일 뿐이기도 한, 정서와 신학, 두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하자. 내가 나가고 있는 교회는 우선 신학적으로 여기서 무어라 적기가 어려울 만큼 참담한 현실 속에 있었고, 나와 대칭점에, 또 대적점에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반면에 정서적으로 나를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언어로 표현하기가 아직은 참 어려운데, 간편히 그것을 개척교회 특유의 정감이라고 부르자. 적어도 내 발로는 영영 갈 리 없었을 만큼, 그곳은 나의 궤적과의 접점을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소개해주신 분이나 담임 목사님과의 관계상 적절한 페이드 아웃 포인트가 어디에 있을지. 남몰래 난 그 절취선을 매 주일 찾고 있었다. 실제로 목사님도 내게 있어 그 교회를 하나의 정거장이나 ‘괜찮은’ 사역지를 찾기까지 머무는 환승센터 정도로 이해해도 좋게금 배려해 주셨다. 사역은커녕 코로나 이후 언제부턴가 한동안은 주일 예배도 잘 나가지 않던 내게, 자신감 없어 하시며 전도사님은 ‘제대로 된 교회’에서 사역하셔야 하실 것 같아요.- 라고 말씀했다. 그렇게 배려해 주시지 않더라도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봄이 오기 전에는 마무리를 짓는 게 좋겠지. 적어도 벚꽃 엔딩을 넘기지는 말자.


하지만 역시 삶은 디지털이 아니었다.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또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련의 과정에서 들이마셨던 어떤 공기가 내가 자라왔던 교회의 기억을 자꾸 묘하게 소환하곤 했다. 이제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우리 교회(서민 친화적 신학 배경을 가진 교단의 분위기, 중소형이나 개척교회 크기의 교회.)의 정감의 숙주가 놀랍게도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 지점이 자꾸 아련했다. 한 주 한 주 독특한 미련을 남겼다.


이즈음 나는, 춘곤증의 진돗개 같았다. 혹독한 반려견 훈련장을 떠나 주인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주일마다, 자꾸 노곤한 앞마당에서 앞발을 내밀고 앉아 볕을 쬐면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게 되었다.


예배와 교인 복지(나를 포함한) 외에는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는 그 힘없고 무력한 교회에는 의아하게도 나의 기억 속 교회의 생기(그것도 아주 적절히, 내가 그리워하는 그 느낌으로)가 살아 있었다. 그게 내 영혼을 아득해지게 했다. 오랫동안 오순절주의적이거나 복음주의적인 카리스마나, 억지 신앙이나, 문화나 놀이나 엠티 이상일 수 없었던 각종 이름의 훈련들에 지쳐있던 내게 약함과 성실함과 열정 없음과 빈자리와 무지는 오히려 반가움이었다. 일종의 약산성 디톡스였다. 자신이 약함과 무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도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참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명이나 신학적 의미와도, 성장이나 성취와도 상관이 없다. 도리어 내가 아주 오랫동안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하는 기독인들을 한심하게마저 바라보았던 행복이나 치유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몇 주간 주일마다 그 밍밍한 국물맛을 한입 한입 떠먹으면서, 나는 니맛도 내맛도 아닌, 이 걸레 빤 물 맛 같은 평양냉면의 육수맛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되어가는 시기인 이 즈음에야 이 분위기가 교회에 대한 내 안의 기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 가면 무서운 선생님 눈치를 보며 긴장해서 앉아 있고, 친구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며 운동을 하고, 어린 아이지만 다툼과 싸움과 두려움과 미움 속에서 한 주를 보내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찬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고,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를 듣는 시늉을 하고, 양반다리를 하고 선생님과 허술한 공과 공부를 하고, 교회 형들과 지하 예배당 바닥에 방석을 깔고 몸을 던지며 놀면서, 온 영혼의 접촉면으로 숨쉬던 무엇. 그것이 바람에 날린 곰팡이 균 같은 것이 이 교회 어디에 떨어져 있다고 느낀 것은 내가 그걸 너무 그리워해서였을 것이다.


그 애잔함을 나는 교회의 모성 또는 엄마성이라고 불러야 되겠다. 나는 아직 이 육수를 떠먹을 때 인상을 찌푸린다. 쩝쩝거리며 맛을 보고 또 보며, 여전히 이 맛은 도대체 무슨 맛일까- 질문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다만 표현하기 힘든 어떤 그리움이 내가 교회를 생각할 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차원이고, 그건 어쩌면 신학의 차원 못지 않게 나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 지금까지는 오직 그걸 알았다.


그렇게만 보자면, 그리움 하나만을 붙들고- 아주 편안하고 간단하게 아무 사심도 욕심도 없이 어떤 교회든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그 반대의 차원에는 그것에 못지 않은 힘을 가진 긴장과 위기가 있다.


나는 그런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아는 자신은 지적인 목마름과 성장에 대한 갈증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너무 큰 사람이어서 편안한 정감이나 뭉클한 노스탤지어 따위 언제고 홀연히 등질 사람이다. 내 안에는 집 나간 삼촌성도 있다.


오랜 친구 석이에 따르면  오학년  학년 단체 행사로 수영장 가기와 미래가 달려있는 축구부 중에서 수영장을 택했다(실은 나도 또렷이 기억하는 일화지만 언제나 그를 통해 듣는 것이 훨씬 재밌었다). 수영장을 가기 전날 나는 축구부를 그만두었다. 아니, 아침에 축구화 sack 아니라 수영복이  투명 비닐 가방을 손에 들고 학교에 가서 기어코 관광버스에 몸을 실던 당일  잘린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탈퇴 과정보다 중요한 것은 이유였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선명했는데 수영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비전과 행복 중에서 망설임 없이 행복을 택했던. 나는 하루 아침에, 라이트  자리가  든든하게 보전되어 있던 축구부를 그만두는 결단력을 . 당시로서는 축구부가 그런 선택을 하는 하려면 지금은 가늠하기 어려운 상당한 압박감을 이겨야 했다. 나는 축구부 선후배나 동료들의 비난과 눈총과 함께 부러움을 한눈에 받을 만큼, 충격적인 원심력의 힘을 실행했던 소년이었다.


그는 아직도 내 안에 그대로이고, 그러니까 나는 얼마든지 이번에도 눈물 찔끔 흘리고 또 예전처럼 트렌치 코트 입고 설레는 표정으로 공항에서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다. 또 이제는 미약하지만 헬리코박터 캡슐 유산균처럼 내 영혼에 아직 살아 남아있는 정의의 감각과 소명에 대한 부담은 생의 의미를 행복이나 치유에서 찾는 일에서 만족하도록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영 지워지지 않을 찝찝함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것이다.




참으로 오묘하다. 그것들은 늘 왜 하나만 충족되는지. 나는 어떤 것과도 결별하고 싶지 않다. 가깝고 낮은 것에 대한 그리움도, 멀고 높은 것에 대한 동경도, 사랑도 정의도, 애잔함도 신학도 다. 그런 마음은 작은 물건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와서도 계속 그리움에 젖어, 또한 그간 너무 많은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지친 이 상태에서, 또 어디서 왈칵 울어버릴까 두려워 짐을 쉽게 풀지도 못하는 나를 닮았다. CU에서 사놓고는 아껴먹느라 안 먹은 맥반석 고구마와 버터는 어느 박스에서 구조되길 바라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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