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생은 여름이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김민기의 가을 편지가 흘러나온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한창 무더운 휴가철에 가을 편지라니. 이 낯섦은 기시감이 있다.
그의 가을 편지는 가을에 들어도 원래 낯선 것이어왔다. 계절과 상관없이 그랬다. 김민기란 존재와, 그가 가진 신념과 개성은 그랬다. 그의 진지함은 좀 지루했다. 너무 두껍고 무거웠다. 늘 어떤 이물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세계와, 한국 사회와, 그리고 괜히 미안하고 뭉클하게도 나와도.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인간미, 사람 냄새 같은 해묵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벌써부터 꼰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 나는 정말 사람 냄새가 그립다. 연애도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 하고 싶다. 남자라는 것도, 연애라는 것도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실은 '사람'이라는 생각만 계속 했다.
인공지능 과학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를 골몰히 생각하는 일은 범상하지 않은 행위다. 그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생 즈음이 아니었을까. 매체는 당연히 라디오였을 것이다. 봉우리였는지 아침이슬이었는지 가을편지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어느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단박에 알았다. 흔한 여느 대중가요가 아니구나. 한끝이 달랐다. 처음부터 그는 너무나 김민기스러운, 김민기였다.
왜인지 그의 노래들은 늘 울음을 삼키고 있는 사람이 만든 것 같았다. 진지하고 깊었다. 느릿느릿하고 굵었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내뱉는 말이라면 한 마디 한 마디 귀담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잊혔다. 공부와 성공과 행복이나 욕망이나 돈이나 이익이 중요했던 세계에서. 나의 길고 혼란스러웠던 세계에서. 아주 아주 오랫동안. 깨끗이 지워져버렸었다.
한참이 지났고 우연히 그에 대한 방송들이 노출되어 보여졌다. 몇 개의 다큐멘터리를 대충 보다가 나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인공지능이니 자동 비닐백 포장이니 키오스크 주문이니.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오랜만에 사람을 보았다.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 영혼 깊이 사람성이 그리웠나 보다. 고집이나 고지식함, 신념, 정, 희생, 인심, 정념 같은 것 말이다. 소위 ’옛날 사람‘들이 가진 특유의 인간미는 더욱 보기 어려워졌다. 대도시의 삶에 현기증이 났다. 나의 주변에는 다 세련되고 감각적이고 유연한 사람들 뿐이었다. 이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 느끼해졌다. 계산이 빠르고, 유행하는 말들만 하며, 개성도 없고 다 똑같아 보였다.
김민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기 언어가 있었다. 노랫말 하나도, 인터뷰 한 마디도 다 자기 말이었다. 자기 인격과 자기 언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성이 살아있던 90년대에도 그는 조금 더 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사람으로 다가오더니, 나에게 잊혀진 시간들조차 완전히 잊히지는 않도록 마음 한구석에 줄곧 사람의 잔향을 남겼다.
세상은 너무 편리해졌고, 모든 것이 돈, 또는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흘러가고 있었다. 자꾸 혹자들은, '다들 바쁜 중에' 비대면이 효율적이니 만나지 말고 무슨 일을 하자고 했다. 살자고 하는 일들인데 살아있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 카페가 지겨웠다. 효율과 쾌락. 소유. 주식과 자동차. 아름다움을 위해 달려가는데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보이는 것의 가치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앞지른 지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에버그린 스물이라 믿었던 나도 어느덧 낡은 사람이 되어갔다. 신념이나 믿음, 또는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을 어린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은 꼰대처럼 보이기 꼭 좋은 일이었다. 시류를 따라 나대지 않았고, 나이스 매너와 젠틀함의 자리를 찾아 콱 틀어박혀 있곤 했다.
문득문득 이게 사는 것인가 싶었지만 편하고 좋았다. 나대지 않아야 부딪침도 없을 수 있었고 존중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와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는 더 그랬다. 가만히 있음은 으른이라느니 지혜라느니, 그렇게 불렀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앞선 지식이나 유연하고 세련된 매너 같은 것. 지적이고 성숙해 보이는 애티튜드.
십년 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다가 주님의 품에 안긴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사람의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가만히만 있다 우연히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한 곡이라도 들으면 뜨끈해지고, 뜨끈해지고는 했다. 그런 미열들이 있었다. 그는 지겨운 걸그룹보다 훨씬 더 신선하고 생생한 자극이었다. 80년대 운동권 세대로부터 한참 이후 세대인 나에게 그의 노래는 정치적인 현실보다는 실존이나 생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일면식도 없는데 그리운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사람이 되었다. 사람으로 살더니 사람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