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헤르만 헤세.
그에게 광장은 단단한 껍질을 가진 알을 깨야지 뛰어들 수 있는 곳 같았다.
오래전부터 약속하고 별러서 만났다. 스무 살쯤 어린 그는 나와의 약속을 앞두고 기대된다는 표현을 썼다. 우린 이른 저녁쯤 만나 나란히 짜장면 곱빼기를 먹었고, 함께 값싼 베리 슬러시를 떠먹으며 꼴깍꼴깍 아아를 삼켰다. 그러고는 아홉 시쯤 지하철역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그 짧은 사이 밝은 낮과 어스름한 저녁, 깜깜한 밤이 모두 있었는데 어느 시간대든 칠월의 여름처럼 습하고 더웠다. 대충 걸쳐 입은 얇은 홑겹 코트마저 철이 지난 날씨란 걸 알았을 땐 집에서 이미 한참 멀어진 후였다.
자양역에서 만나 가까운 대학을 통과해 중국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 캠퍼스는 친구가 다녔던 학교로,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스무 살 때 친구를 따라 가파른 계단형 강의실에 들어가서 친구가 듣는 북한학 강의 도강을 하며 시키는 대로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의 출석에 대신 대답하고, 호수 모퉁이쪽의 고건물 앞 시멘트 코트에서 농구를 했다. 길고 지루한 여름방학 어느 날 친구네 과 1학년 동기 여자애들과 과 선배들과 섞여서 바닷가 엠티를 따라가던 날, 아침 일찍 만난 약속 장소도 그 캠퍼스였다. 친구와 몽글몽글한 썸을 타던 수아라는 애와 셋이, 난생처음 포켓볼이란 것을 치던 곳도 그 학교 앞 2층에 있던 넓은 당구장이었다. 추억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땅이었다.
캠퍼스 호수의 끝쯤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스퀘어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가까워져 올수록 노래의 음량은 점점 더 커졌고, 나는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설마 백예린은 아니겠지. 풋풋한 옷차림으로 작은 무대 위에 서 있는 그들은 단과대의 밴드 동아리쯤으로 보였다. 누가 되었든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백예린이 아니라 빌리 아일리시였어도 나의 생과는 아무 개연성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속에서 어떤 작은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철 지난 외투가 떠올랐다.
아, 덥다. 가방 좀 받아줄래? 비로소 나는 근처에 보이는 고철 바리게이트 위에 백팩을 올려놓고 봄 코트를 벗어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 답답한 겉옷을 벗을 생각조차 못 했던 건지, 답답함을 견디는 일이 익숙했던 건지. 내가 왜 그랬는지.
마침 학교는 축제중이었다. 후문 쪽으로 좀 더 걸어가다 어느덧 길가에 즐비한 주점 풍경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주점 거리는 무척 붐볐다. 제각각 풋내 나는 멋을 부린 두셋의 아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끝도 없이 버거운 물보라처럼 마주쳐왔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는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내심 나는 그곳의 공기의 입자까지 흡수하고 있었다. 활기찬 돌고래 떼를 거스르는 진지한 물고기생 말년의 연어처럼, 나의 스무 살을 살고 있는 아이들의 무리를 역류해 가고 있었다. 나는 걸어 나가며 틈틈이 찰나 떠오르는 단어들을 메모했다. 몸(전동 휠체어 타는 할아버지), 정신(내 정신의 장벽에 대해), 캘리포니아, 청춘, 자유.
인생의 짐 같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이제 볼록 나온 배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래된 디자인의 남방을 벨트 안으로 집어넣고, 나는 혼자 나의 스무 살을 관통해 지나가고 있었다.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던 하나의 어떤 세계가 긴 동면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는 듯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얼려져 있던 스무살의 감각이 녹아내리더니 붕대도 다 풀지 못한 좀비처럼 나대기 시작했다. 별안간 그때만큼은 긴 겨울의 눅눅한 속옷 같던 나의 마음과 영혼이, 하얀 여름 햇살에 바싹 마른 흰 티처럼 변성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옆에서 나와는 또 달리 눅눅한, 하나의 세계를 걷고 있을 친구에게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졌다. 너 그럼 지금이 인생 첫 대학 축제야? 지금 느낌 어때?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싶었다. 그가 자신과 전혀 다른 문화와 의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시공간이 포개지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나는 무척 궁금했다. 아이는 선뜻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말을 입안에서 고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단지 봄 축제의 복판을 걸어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그는 무척 긴장한 듯 보였다. 그 아이의 그것은 나의 벅참과는 다른 벅참 같았다. 만나는 내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끝내 삼켰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Demian, Hermann Hesse. 실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